윤석열 정부의 과학기술 혁신정책: 과학기술 지정학의 부상과 기술혁신·외교안보의 만남
배영자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ybae@konkuk.ac.kr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글로벌 혁신 환경의 변화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4차산업혁명의 가속화와 미중 기술패권 경쟁 및 코로나 지속의 환경속에서 헤쳐나가야 할 많은 도전 과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은 물론 국가안보를 위한 초석이자 중요한 외교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역대 정부들은 한국의 과학기술혁신 역량 증대를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실행해 왔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혁신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과학기술정책을 모색하고 수립해야 한다.
지난 수 십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역량 강화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질서와 개방적인 글로벌 혁신체제 안에서 이루어져왔다. 자본과 상품 및 인력의 비교적 자유로운 이동속에서 상품을 수출하고 인력을 훈련 및 양성하고 기술을 습득하였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반도체, 5G,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미국이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대중 수출규제 강화, 중국 자본의 미국 첨단기술기업 인수합병 규제, 첨단 부문에서 미중간 인력 교류 제한, 대중 견제를 위한 동맹 강화 등의 조치들을 실행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시장 논리에 따라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던 상품과 자본과 인력의 흐름에 지정학적 관점이 개입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추세가 미국을 넘어 확산되면서 현재 세계 무역 투자 생산의 흐름과 혁신 방식에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무역 투자 생산 혁신에 대한 지정학적 접근이 우세하게 되고 과학기술이 지정학의 주요한 요소로 부상하면서 우리의 과학기술 혁신정책도 이를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유롭고 개방된 시장 논리에 토대하여 실행되어 온 기존 과학기술 혁신정책이 재검토되고 경제는 물론 외교 국방 안보적 관점과 틀안에서 통합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경제안보와 과학기술 혁신 공급망 조정
미중경쟁과 코로나 확산으로 경제안보 이슈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안보는 과거에는 사회질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저소득층 생계 지원의 필요성, 혹은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안정이 국가안보의 주요한 토대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미중 기술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경제안보는 주로 공급망 안정성과 수출규제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 공격적으로 경제안보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여타 국가들도 이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경제안보 이슈는 얼핏 잡아보아도 공급망 기술 통상 투자 사이버 국방 외교 보건 등 다양한 부문이 국가안보적 관점에서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닌다. 미국의 경우 자국 첨단기업 인수합병 제한, 첨단기술 수출규제, 연구인력교류 제한,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산업 공급망 안정성 확보, 자국 첨단기술투자 증대, 기술과 가치를 아우르는 동맹 강화 등을 주요 경제안보 이슈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미국 국방부는 무기나 방위산업에 직접 관련되는 기술뿐 아니라 국방에 영향을 미치는 신흥 및 기초기술 부문도 광범위하게 국가안보를 위한 규제에 포함시키고 있다.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한국 역시 주력 기술제품의 생산 및 혁신과 관련된 공급망을 점검하고 국내 기술력으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 조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요소수 대란을 통해 공급망 교란이 남의 일이 아님을 경험한 바 있다. 코로나 경험은 유사시 보건 이슈 또한 공급망 안정성의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다른 한편, 아무리 경제안보 시대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없고 생산과 혁신 과정에서 국제협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상품 자본 인력의 국경을 넘는 협력을 보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조정해 가야 할 필요가 있음은 명백하다. 시장논리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거래를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누구와 무엇을 거래하는지에 내포된 장단기적 위험이 외교 안보 보건 등을 포함한 포괄적인 관점에서 검토되고 이에 따라 공급망을 조정하고 무역 투자 정책을 점검해야 한다. 기술제품의 생산과 혁신, 거래 전 과정에 걸쳐 경제적 비용과 외교 안보적 관점이 보다 통합적으로 고려된 과학기술 혁신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창조적 불안정기의 대대적인 과학기술혁신 투자
이제까지 혁신연구는 기술혁신을 주로 국내 제도와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해 왔다. 그러나 최근 안보 위협이라는 외부 세계정치경제 환경과 이에 대한 인식이 기술혁신을 추동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보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기술혁신 과정과 결과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고 배분적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기술혁신 예산이나 정책에 대해 국내적 지지나 저항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안보 위협 및 이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혁신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합의가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지고 적극적인 투자가 진행된다. 외부 위협 자체가 기술혁신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반대로 외부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강하지 않아 기술혁신에 대한 국내적 논란이나 저항이 더 두드러지는 경우 기술혁신에 자원이 집중되기 어렵다. 예컨대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했을 때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여 NASA를 설립하여 우주기술 혁신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NASA와 같은 대규모 연구기관을 만드는데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겠지만 미국내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인식 공유로 우주 기술혁신 강화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형성되었고 이의 결과로 미국은 최강의 우주기술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창조적 불안정(Creative Insecurity)’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야흐로 현재 세계는 다시 창조적 불안정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 와중에 기술이 국력의 핵심적 토대로서 국가의 세계정치경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많은 국가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결정하고 있다. 특히 4차산업을 뒷받침하는 기술혁신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소위 디지털경제 데이터경제로의 이행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견인하는 신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 의회는 기초과학, 반도체제조, 통신, 이공계 인력양성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자국 기술혁신역량을 제고하고 중국과 기술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패키지법안 ‘혁신경쟁법’ ‘미국경쟁법’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14차 5개년규획(2021-2025)’ 등을 통해 첨단 기술혁신이 이끄는 발전과 기술자립을 국가전략의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며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국가 핵심전략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법안 등 지원방안이 논의 중이지만 그 강도와 규모에서 미국과 중국의 절박함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기술혁신이 과학기술 부문만의 문제로 인식되고 외교안보나 국가대전략의 차원으로 확장되지 못한채, 기술혁신과 외교안보가 서로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반도체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 기술은 한국의 세계정치경제 위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외교적 자산이 되었고 앞으로도 첨단 기술력은 한국의 국력을 가늠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술혁신은 한국 외교안보 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대한 한국 대응 전략의 핵심은 미중 가운데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를 넘어 우리가 어떤 기술을 지속적으로 세계시장에 내 놓을 수 있는지, 우리는 기술에 토대하여 어떤 미래사회를 선택하고 만들어 갈 것인지의 문제로 귀착된다. 예컨대 반도체 우위를 오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포스트 반도체를 무엇으로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신기술의 가능성과 도전을 어떻게 구현해 갈 것인지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공약을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과학기술 부문을 세심하게 선정하여 해당 연구에 대해 10년 이상 장기지원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며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의 세계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과학기술 부문에 대한 투자가 견고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위시한 신기술의 부상과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창조적 불안정 상황에서 과학기술혁신과 외교안보 부문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국가대전략이 마련되고 이를 뒷받침할 과학기술투자와 시스템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협력과 조정의 과학기술외교
전통적으로 과학기술과 외교 안보는 각각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하면서 간헐적으로 만나왔다. 예컨대 19세기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은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증기선과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의 발명으로 가능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연구개발 국제협력, 과학기술 국제기구 활동, 과학기술 공공외교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기술과 외교가 만나는 접점이 확장되며 과학기술외교가 활발히 수행되고 있다. 현재 4차산업혁명의 진행과 함께 미중 기술패권 갈등이 전개되고 있고 첨단기술부문에서 국가들간에 치열한 선두다툼이 벌어지는 경쟁의 과학기술외교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코로나 확산, 기후변화 등 인류 공동의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후기술, 친환경 에너지기술, 백신 및 치료제 등 과학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국가들간에 이를 둘러싼 협력의 과학기술외교에 대한 요청이 높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기술 발전이 미중 패권경쟁의 틀안에서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기술들이 제기하는 문명 도전 측면에 대한 인식과 대응 모색이 뒷전으로 밀린 채, 상대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기술 발전의 좌표가 설정될 위험이 커지고 있는 부분이다. 이 경우 미중 기술경쟁의 최후 승자는 미국도 중국도 아닌 인간을 밀어낸 기술이 될 가능성이 높다. 킬러로봇이 국가안보를 담당하고, 생산을 인공지능 로봇이 주도하고, 다양한 유형의 인간 기계 이종적 결합이 등장하고, 메타버스 영역이 확장되면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이를 조정해 가는 과정에서 국제협력과 규범이 필수적이다. 코로나 및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인공지능 생명과학기술의 국제규범 형성 등 어떤 국가가 세계정치 패권국이 되는지 만큼이나 중요한 글로벌한 이슈들에 대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대외적으로 비숫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중견국들간의 국제 공조를 이끌어 나가는 협력과 조정의 과학기술외교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나가며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개별 부처가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안보와 과학기술외교 이슈들을 풀어가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구상하고 조직 개편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도전으로 다가오는 문제들은 모두 경제 기술 외교 안보 보건 등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결해야 한다. 새 정부 과학기술정책의 성공적 수행 여부는 다양한 부처간 협력과 조정을 진행하며 힘있게 추진해 갈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여러 부처를 아우르는 이슈에 대해 각 부처간 협력이나 조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용이하게 이끌수 있는 거버넌스의 모색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