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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판결과 한일관계 [정세와 정책 2021-2월호-제4호]

등록일 2021-02-01 조회수 7,587

위안부 판결과 한일관계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jincs@sejong.org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은 일본정부에게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피해자 12명에게 1인당 1억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과 미국 등의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 또는 각하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서울중앙지법의 이번 판결이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면서 한국정부에 시정조치를 요구했다.1) 일본 여론은 마이니치신문의 주장처럼 위안부 제도가 "추악한 역사"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한국 법원이 일방적으로 일본 정부를 재판하는 것에는 비판적이다. 일본 집권 자민당의 반발은 더욱더 거세다. 12일 열린 외무성과의 당정협의에서 자민당은 한국 법원의 위안부 판결과 관련해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와 남관표 주일본 한국대사에 대한 귀국 요구 강창일 신임 주일 한국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주재국 동의) 취소 또는 입국 거부 아이보시 고이치 신인 주한국대사 부임 보류 등의 '강력한 대항조치'(보복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당장 대항 조치를 취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일본 정부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하려는 원고측의 요구가 거세어지면 한일 갈등도 증폭할 것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이번 위안부 판결이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한국 정부의 대응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안부 판결의 의미

 

이번 위안부 재판의 최대 쟁점은 주권 면제 원칙을 한국의 법원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번 판결에서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행위"는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위안부 문제는 "피고(일본)에 의해서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진 반인도적 범죄"라며 관습 국제 법보다 우위에 있는 "강행 규범"에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피해를 당한 개인의 배상을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취지이다. 즉 위안부 문제는 절대 규범을 위반한 반인권적 범죄로 국제관습법에서 예외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제사회에서 예외 없는 주권면제 절대주의가 주류였지만 국가의 상업적 행위나 불법 행위 등에 대해서는 면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권면제 제한주의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04년 유엔이 채택한 국가면제협약(미발효)에서도 불법 행위는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 예외 범위는 정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주권 면제 논란 사례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강제 노동을 한 이탈리아인이 독일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이 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4년 국제적인 인권에 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주권 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리스에서도 독일 학살사건 유족이 배상을 요구한 소송에서 주권 면제를 부정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소송을 둘러싸고는 독일이 국제 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절대 규범 위반과 국가 면제는 별개 사안이라며 이탈리아 법원이 국제법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ICJ는 무력분쟁 수행 과정에서 군대 등 국가기관이 다른 나라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를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국제적으로도 주권면제를 두고 논란이 있는 만큼 실제로 일본 정부 재산을 강제 집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의 국내 자산의 압류는 또 다른 의미의 주권 면제 조항을 훼손하는 것으로 한일 외교 근간을 흔들 수 있다. 또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국가간 합의로 남아있어 한국 정부의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

 

지난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강창일 대사 부임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야 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문 대통령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 위안부 판결은 201810월 강제징용피해자 판결 이상으로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전개될 한일 대립의 결말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의 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한일관계 해빙기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대로 한일관계를 방치하면 한일 단교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의 감정 대결은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마저 발동되면서 한일관계의 악화에 대한 위기의식조차 없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은 1965년 기본조약의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 보완조치를 취하면서 한일관계가 발전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게 역청구권을 주장했던 일본 정부도 한국의 끊임없는 노력에는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 아시아 국민들의 피해와 고통에 사죄하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고자 했던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공동선언, 2010년에는 급기야 한국을 직접 언급하여 사죄한 칸 담화로 이어졌다. 불충분하지만 아베 총리조차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수동적인 자세로 과거사 문제에 대응하고자 한 일본도 법적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의적이고 인도적인 측면에서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한일관계는 발전할 수 있었다.

 

최근 한일 양국에서는 이러한 한일관계의 흐름을 잘못된 역사의 과정이라고 보는 인식이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어정쩡한 타협을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비판한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이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하며 일본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일본 또한 한국에 양보를 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참에 약간의 피해가 있더라도 한일관계의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마저 있다. 이번 위안부의 판결로 한일 양국의 원리주의자의 주장이 거세어질 것 같아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일 양국이 해온 노력을 부정하기 보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한일관계의 역사는 상대방을 비난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공생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상황은 사법부의 판결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라 한일의 감정 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고 있다. 이번 위안부 판결로 지금까지 인정되지 않았던 강제징용의 군인, 군속들도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의 가능성이 열려 판도라 상자는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이 4월 보궐 선거를 시작으로 선거의 계절로 접어든다. 한국 정치권이 반일의 유혹을 극복하고 윈윈할 수 있는 대일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일본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스가 총리는 점차 지지율이 내려가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게다가 올 9월까지는 선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한일관계의 결단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도쿄올림픽까지 전기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한일 대립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응방향

 

한국 외교부는 정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히면서도 “2015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일본 정부가 책임을 다하도록 요구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외교부의 입장을 보더라도 이번 위안부 판결에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강제징용문제 때처럼 사법부의 판단이라고 문재인 정부가 강건너 불구경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지난 2년간의 한일관계가 말해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한일관계를 배타적 민족주의 보다는 미중전략경쟁이라는 국제정치적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면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국제연대에 한·일은 함께 협력을 요구받을 상황이 도래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201312월 부통령 당시에도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공조와 한일관계 개선을 강조한 바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의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과 함께 군사적 억제, 인권과 민주주의를 통한 국제 규범을 중시하고 있다. 이점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한일 양국의 행태는 협력과는 거리가 멀다. ·일 정부는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도 과거사 프레임에 매몰되어 국익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최근 한일 양국은 대한수출규제조치(일본)와 지소미아 파기 카드(한국)로 서로의 발목을 잡으면서 국익마저 훼손시키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미중 대립이 심화되면서 각국의 합종연횡이 빈번한 최근 국제정치 상황에서는 한일 양국의 이익은 수렴하는 측면이 많다. 미중으로부터 자신의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중견국의 역할을 확대하고 강대국 정치의 시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일 협력은 필수적이다. 또한 한일 양국은 경제적으로도 상호의존이 진행되어 경쟁도 하지만 서로 보완하는 측면이 많다. 특히 제 4차 산업 혁명시기에는 한일 양국이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표준을 주도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이 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강대국의 자의적 강권 질서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질서의 확산을 주장하는 중추적 동반자로서 협력한다면 서로의 국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일 협력은 한일 양국 정부가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에서 벗어나 투트랙 접근(과거사와 경제·안보협력의 분리)을 실천하는 것에서 강화될 수 있다. 양국 정부 공히 과거사문제(강제징용문제, 위안부문제)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면서 투트랙 접근은 말잔치로 끝났다. 지금이라도 양국 정부가 투트랙 접근의 원칙으로 돌아가 상대방에 대한 전략적 위상을 재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은 당장의 과거사 현안보다는 갈등 관리를 우선하면서 한일 협력의 동력을 찾아야 한다. 당장 문 정부는 한일관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일본과 역사 화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죄와 반성이 먼저라는 손쉬운 주장만으로는 일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이 장기적인 시야에서 역사 화해를 할 수 있는 교육, 상징적인 조치 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국익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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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권면제란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이며, 모든 국가의 주권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따라 재판을 통해 내정간섭을 막는다는 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