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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논평 No. 2018-41] 아난 (Kofi Annan) 서거에 부쳐

등록일 2018-08-24 조회수 8,548 저자 정은숙

 

아난 (Kofi Annan) 서거에 부쳐

그의 업적과 유엔의 과제

 

 

지난 주 토요일 (8.18) 7대 유엔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80세로 스위스 베른에서 짧은 병고 끝 영면했다. 그는 아프리카 가나 출신으로 유엔사상 첫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출신 사무총장이며 동시에 유엔사상 첫 유엔직원 출신의 사무총장이었다. 생전 그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로 평가돼 왔다.

 

 

이 시대 인류에게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20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지르는 10(1997-2006), 전세계 매스컴을 통해 그가 유엔이란 세계 최대 포괄다자기구 (193 회원국) 수장으로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더하여 퇴임 후에도 지난 12년 아난 재단 및 글로벌 명사 모임인 The Elders를 통해 꾸준히 글로벌 분쟁 중재 및 세계 평화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케냐 선거 소요사태 중재 (2007), 시리아 유엔 특사 (2012), 미얀마 로힝야족 분쟁해결 자문위원회 위원장 (2016-2017)을 맡았었으며 나이지리아 등지 평화적 선거 지원, 아프리카 전역 지속가능한 농업 및 행정 지원 등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런 고인의 서거에 유엔안팎에서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있다. 구테흐스 현 유엔사무총장은 아난은 어디에서건 모든 이들에게 대화의 공간, 문제해결의 장소, 더 나은 세계에의 길을 제공했다고 술회하며 그의 유산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영감으로 남을 것이라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작전에 대해 아난과 이견을 가졌던 조시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도 세계가 그의 경륜을 잃게 됐다고 평했다.

 

여기서는 간략히 아난의 이력과 업적을 회고하고 이를 계기로 유엔의 과제를 짚어 보고자 한다.

 

고향 가나에서 대학교 재학중 미국 미네소타로 유학, 경제학사 학위를 받고 1년간 제네바 소재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는 곧 1962년 제네바 세계보건기구’ (WHO) 행정·예산 담당관으로 유엔체계 경력을 시작한다. 이후 아프리카 경제위원회, 유엔긴급병력 (UNEF) II,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 그리고는 뉴욕 유엔본부내 인사, 예산, 보안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으며, 사무총장 직전 마지막 직책은 유엔평화유지활동 (PKO) 전담 사무차장’ (1992-1996)이었다.

 

1945년 창립이후 유엔의 정당성과 효율성은 늘 시험대에 서 왔다. 그러나 그의 사무총장 재임 10(1-2)은 한층 더 도전을 받았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의 선임인 부투로스-갈리 총장 재임기(1992-96) 냉전질서 종식을 계기로 시작된 지구촌 곳곳의 내전과 학살이 지속됐으며, 글로벌 테러리즘, 비확산레짐의 위기, 국제금융위기, 아프리카의 빈곤과 저개발. 기후 온난화 심화 등 각종 신()안보위협이 자리를 잡는 변혁기였다. 세계평화를 위한 그와 유엔의 노력은 2001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사무총장으로서 아난의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는 효율성 증진을 위한 유엔 개혁이었으며, 인권, 법치, ‘새천년개발목표’ (MDG, Millenium Development Goals)와 아프리카 발전, 시민사회, 기업 등 글로벌 공공의 역할확대, PKO 고양 등이 주요 성과부문이 될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룬 그의 글로벌 계약구상(1999)2011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기업의 인권지침채택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MDG (2000-2015)의 성공은 2015년 좀더 야심적인 지속가능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2015-2030) 채택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의 재임중 2002년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 (ICC)가 출범, 학살 등 심대한 범죄를 저지른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및 기소가 시작됐다.

 

 

2005년 유엔창설 60주년 기념 특별정상회의는 9년차 사무총장이던 아난에게 퇴임에 앞서 자신의 원대한 비전과 구상을 회원국들에게 승인받는 기회가 됐다. ‘평화구축위원회’ (Peacebuilding Commission) 및 기존 인권위원회를 대체할 인권이사회’ (Human Right Council) 출범, “대량학살, 전범, 인종청소,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로부터의 보호책임 (R2P, Responsibility to Protect)’ 채택; MDG 재회부 등은 회원국이 개혁주체이지만 아난 자신의 의제이기도 했다. Foreign Affairs (2005)에 게재된 In Larger Freedom: Decision Time at the UN” 이라는 제하의 그의 기고 및 유엔총회 보고문(2005)발전, 안전, 인권, 유엔개혁등에 대한 아난의 현실진단과 간곡한 제안을 담고 있다.

재임기 유엔사무총장으로서 그의 외교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나이지리아 민주정부 수립 타결 (1998), 이라크-유엔안보리간 무기사찰 및 여타 의제에 관한 이견조정 (1988), 티모르 레스테 독립과정 관여 (1999), 이스라엘의 레바논 철수 및 헤즈볼라 대치 중재 (2000, 2006) 카메룬-나이지리아간 마카시반도 분쟁 국제사법재판소 (ICJ) 회부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하더라도 누구나 그러하듯 아난에게도 한 인간으로서, 또 공무수행자로서 아픈 기억이 없지 않다. ‘유엔평화유지 전담 사무차장시절 유엔이 미처 예방치 못한 가운데 벌어졌던 르완다 (199480만명 희생)와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19958천명 희생) 학살 사건, 그리고 총장 제2기인 2005년 드러난 이라크 석유-식량 프로그램’ (1996-2003) 스캔들이다. 전자는 유엔 실패의 경험으로 이후 사무총장 아난의 글로벌 전략 사고에 큰 영향을 준 계기가 된다. 국제사회의 보호책임개인주권개념의 출현, 안보리 상임이사국 분열과 결정 지연, 회원국 지원 결여 등에 대한 실망과 그 대안의 필요성 인식 등이 포함된다. 아난은 이 아픈 경험을 누차 술회하곤 했다.

 

후자는 사무총장 제2기 발생한 스캔들로 유엔의 이라크 제재기간 석유를 팔아 그 대금으로 식량 등 생필품을 구매토록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난총장의 아들이 유관 스위스 업체와 연관됐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었다. 아난은 사무총장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이것이 큰 시험대였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2006년 퇴임시 그는 많은 공헌으로 인해 역대 유엔사무총장중 가장 인기있는 총장의 한 사람으로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일찍이 1952, 초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는 임기를 마치면서 유엔사무총장직을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 (the most impossible job on the earth)이라 평했다. 이상적 목표속 현실적 한계와 제약을 극복해야 하는 직책임을 말한다. 20188월 아난의 영면을 맞아 인류는 그의 공로와 함께 그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들 혹은 실패한 기억까지도 포함하여 유엔의 정당성과 효율성, 무엇보다도 관련성 (relevance)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시리아 내전과 미얀마 로힝야 탄압의 종식,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핵비확산(NPT) 레짐 복귀, 미국, 중국, 러시아를 위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한 단합된 정치적 의지, 그리고 회원국들의 유엔 다자주의 지지 제고 등을 말한다. 회원국들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주저하면 국제질서는 불안정한 강대국관계로 되돌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