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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비핵지대 논의의 진전 및 실현 가능성 [정세와 정책 2020-11월호-제29호]

등록일 2020-11-03 조회수 7,181

 

동북아 비핵지대 논의의 진전 및 실현 가능성
 

 

조경환 (전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kwhan80cho@gmail.com 

 

들어가며


동북아 비핵지대(NWFZ; Nuclear Weapon Free Zone) 구상의 본래 개념은 미국의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를 보장받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 사용을 중단한다면 북한도 역내 핵 국가인 미·중·러의 법적인 안전보장 조건 아래 핵 능력을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비핵국가로서 비확산조약(NPT) 의무를 온전하게 따를 경우, 미국은 적어도 북한을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선제공격(first use)은 안 한다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s)을 조약으로 보장하며, 종국적으로 북한이 이 비핵지대에 참여한다는 시퀀스이다.


이 구상은 여전히 흥미를 끌고 있고 학계에서 다양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개념과 프로세스에 전례 없이 나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중 간의 전략적 경쟁은 심화하고 북한의 핵 능력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 과거 어느 때보다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구상으로 들린다. 개념에 내재하는 한계도 있어 부진이 길어진다. 


따라서 논의 과정에 편견을 없애고 적절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상적일 뿐 비현실적인 사변에 그칠지 모른다. 비핵지대 구상을 둘러싼 이념 논쟁은 걷어 내고, 역내 국가들의 안보·경제적 이해의 접점을 정밀하게 찾아내어 설계하는 실사구시가 필요하다.


동북아 비핵지대 구상의 긍·부정 상황


동북아 비핵지대의 실현 가능성은 북한 비핵화 논의의 진전 여부가 사실상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 개념은 지금 전환점(critical juncture)에 직면해 있다. 북한은 2017년 9월 3일 6차 핵실험을 했다. 열핵, 수소폭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9일 ‘핵무력 국가’의 완성을 선언했다. 첫 ICBM인 북한명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한 직후이다. 주한 미군은 ‘2019 전략다이제스트’에서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고 공식 평가했다. 


북한의 핵 능력은 진화 일로이다. 올해 10월 10일 북한의 당 창건기념 열병식에 등장한 ICBM은 ‘화성-15형’보다 외형에서는 더 크다. 핵탄두 보유량의 경우, 2017년 8월로 돌아가 보면 미국 국방정보국(DIA)은 60개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군비통제협회 및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0년 기준 30-40개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은 미 대선 국면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 등 전략 도발의 타이밍을 저울질하고 있다. 2019년 10월 2일 처음 테스트한 ‘북극성-3’은 개량된 ‘북극성-4ㅅ’의 모습으로 이번 열병식에 나타났다. 


김 위원장의 ‘핵 국가’(nuclear weapon state) 의지는 단속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7월 27일 6차 ‘전국노병대회’ 연설에서도 “핵 보유국에로 자기발전의 길”을 언급했다. 주유엔 북한대사는 9월 29일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 없다”고도 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의 단계를 점점 올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경제적으로는 세계가치사슬(GVC)에서 중국을 제외하여 봉쇄하려 의도이다. 이는 중국이 그간 북한의 비핵화를 바라고 이를 위해 미국과 일정 부분 공동보조를 취해온 점을 고려하면 장애 요인이 된다. 


한편 비핵지대 구상에 긍정적인 환경도 있다. 올해 들어 김 위원장은 국제제재 완화보다는 안전보장에 더 강조를 두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리고는 자력갱생이다. 2019년 2월 결렬로 끝나버린 미국과의 하노이 협상에서 평양은 당초 워싱턴이 제재를 일부 거두어들이면 영변의 핵시설을 폐기할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치를 약속할 복안이었다. 이제 협상의 가드를 올렸다. 2020년 벽두 당 전원회의 결정서를 통해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버리지 않는 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과의 추가적 협상은 없다고 단언했다. ‘비핵화 대 안전보장’ 교환 구도를 만들어 핵 군축으로 가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비핵화의 범위를 북한으로부터 미국의 확장억제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으로 일관되게 확장해 왔다. 


그러나 핵 국가로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가 장기화하여 가는 상황에서 코로나19와 기록적인 수해로 인해 전국적인 사회경제적 타격이 당장 막심하다. 김 위원장도 몇 차례 자인하는 바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의 군사적 옵션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그리고 비핵지대 개념의 구성요소에 접근하는 방법론으로서 최근 주목할 만한 것은 양자관계 주축의 단극체제를 선호해 온 미국이 요즈음 동맹국들 및 파트너국가들과의 다자주의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NATO 체제를 원용한 집단안보와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중국 봉쇄 목적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미국 대선 TV토론(10.22)에서 민주당 바이든 후보가 “한반도는 비핵지대(a nuclear free zone)가 되어야 한다”고 밝힌 점도 이목을 끈다. 또한, 2019년 8월 2일 미국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탈퇴는 중장거리 탄도·순항미사일로 중무장한 중국과의 군축협상으로 연결될 지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동북아에 다자적인 안보협력 구조 설립을 논의하는데 위협요인일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기회가 된다. 동북아 비핵지대로 가는 새로운 플랫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핵화’와 동북아 비핵지대에 대한 북한의 관점


북한은 자체 핵무기 개발의 대안으로서 ‘한반도 비핵지대’에 열의를 보여 왔다. 1970년대 김일성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 소련은 이 구상을 지지했다. 19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 핵무기 철수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하자 북한은 남한에 ‘한반도 비핵지대’를 제안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제안에 대해 한미는 “한국에서 미국의 핵무기 철수를 압박하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시각에서 일축했다. 북한의 유일한 선택지는 북한의 비핵화이며, 핵 국가도, ‘한반도 비핵지대’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완전하고 불가역적 비핵화(CVID)는 ‘굴복’을 의미하는 용어라면서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핵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있다. 현재까지 비핵지대와 관련한 북한의 후속제안은 없다.


‘비핵화’의 정의와 동북아 비핵지대의 개념은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비핵지대에 관한 북한의 관점은 북한의 ‘비핵화’ 의중을 통해 부분적으로 추적할 수 있겠다. 2016년 7월 6일 북한은 정부 대변인 성명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5가지 요구사항으로 ⓵ 미국의 핵무기 공개 ⓶ 남한의 모든 핵 무기·기지 철폐 및 세계 앞에 검증 ⓷ 미국이 한반도와 그 주변에 핵 타격수단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담보 ⓸ 핵 위협이나 북한이 반대하는 핵 불사용 확약 ⓹ 핵무기 사용권을 보유 중인 주한 미군의 철수 선포를 제시했다. 또한, 북한 중앙통신은 2018년 12월 20일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비핵화’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라면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북한의 일방적 비핵화이며, 이는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의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 합의와 배치되는 것이라고 북한은 계속 불만을 제기한다. 


핵능력 증강에 관한 김 위원장의 언명은 비록 그 말을 지킬지를 입증하기는 어렵다하더라도 의도를 해석하는 데 유용하다. 김 위원장의 말이 의하면 핵무기는 억지와 강압적 외교, 그리고 체제 생존에 사활적인 것이다. 핵무기를 국제 사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고, 미국과 남한으로 하여금 전략적 셈법을 바꾸도록 압박하며, 중국에 대해 유효한 레버리지를 갖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2016년 당 대회에서 핵무기는 적대적인 핵 국가로부터의 침략·공격 격퇴 및 보복 공격용임을 밝혔다. 2018년 4월 방북한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에게는 “내 아이들이 평생 핵을 지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2019년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비난하며 전략 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의 완전 중지를 주장했다.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적극적 다자협상을 제안했다. 또한, “완전한 비핵화는 불변의 입장이며, 핵무기를 이미 더 이상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을 선언했다. 이번 당 창건기념 연설에서도 전쟁억제력 강화에 방점을 두고 남용과 선제 불사용을 강조했다. 


북한은 표면상으로는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목표와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 바람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 포기 불가를 외치지만 그들도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할아버지가 제안했던 ‘한반도 비핵지대’ 정책을 되살릴 가능성이 그래서 남아 있다고 본다. 동북아 비핵지대 개념을 북한의 관점으로 좁혀서 본다면, 그것은 단지 북한뿐 아니라 남한과 미국에도 의무가 주어진다.

 

동북아 비핵지대 현실화 방안


동북아 비핵지대를 현실화할 의미 있는 논의들이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등 학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핵 확장억제와 비핵지대가 양립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북한이 NPT 조약에 완전하게 복귀했을 때만 미국이 소극적 핵 안전보장을 정치적으로 해줄 수 있으며 그 이후 법적 보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북한과 미국 간, 그리고 북한과 일본·한국 간에 외교 관계가 없는 지금 북한을 조약으로 가져갈 적실한 방법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수도 없이 약속을 파기했고, 속여 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 등의 학계가 동북아 비핵지대 개념에 관해서 우려하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이라고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간의 비핵지대 구상을 보면, 일본과 한국이 먼저 참여한 뒤 북한은 뒤늦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은 데다 북한이 일본과 한국 내 모든 미국 군사기지 조사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북한에 특혜라는 점이다. 지난 9월 30일 ‘글로벌평화재단’ 등 공동 주관의 국제포럼에서도 미국 측은 동북아 비핵지대 이후에도 미·한·일 동맹 유지가 가능한지, 북한의 비핵화는 진정성이 있는지, 한·일에 전략 자산의 계속 배치는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런 점들은 왜 중·러가 비핵지대를 선호하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바라고 있다. 비핵화된 불안한 북한보다는 안정된 북한을 그래서 유리하게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기존 양자회담 구도와 별도로 역내 다자안보협력 기제의 맥락에서 동북아 비핵지대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2019년 12월 세종연구소와 일본 ‘핵무기폐기연구센터’(RECNA)가 공동으로 제안한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역내 다자안보협력프레임워크는 각국의 안보·경제적 이해의 접점을 정밀하게 찾아내어 설계해야 한다. 미세먼지, 해양오염, 감염병과 같은 비군사적인 신안보 이슈를 다루는 것이 좋은 출발이 된다. 그 후 점차 비핵지대 구상을 포함한 안보 이슈로 옮겨가면 자연스럽다.미·중의 갈등과 중·러의 밀월관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우선 한·중·일 정상회담과 같이 기존에 확립된 구조를 바탕으로 작지만 구체적으로 접근해 가야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남·북·러 삼각 협력을 적극 이용할 수도 있다. 역내 국가들 간 신뢰 구축에 우호적인 환경을 촉진해가야 한다. 


북한이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안전보장 없이는 더는 공식 협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확언한 점을 감안, ‘비핵화’와 동북아 비핵지대 대화를 끌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안전보장을 역내 국가들이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비핵화’ 협상 전체의 성공은 물론 제도화된 동북아 비핵지대 창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톱다운 방식의 역내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 2008년부터 매년 이어온 한·중·일 정상회담은 꽤 적합한 다자적 논의 공간이다. 이 연례 정상회담에 다른 역내 정상을 차례로 초청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첫 초청 대상이 될 수만 있다면 최선의 시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