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금강산 내 남한 시설 철거 지시와 한국의 대응 방향
[세종논평] No. 2019-27 (2019.10.29)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
softpower@sejong.org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최근 금강산관광지구를 방문해 남한이 건설한 시설의 철거를 지시했다고 북한 로동신문이 지난 10월 23일 보도했다. 김정은은 먼저 고성항과 해금강호텔, 문화회관, 금강산호텔 금강산옥류관 등 남한이 건설한 시설들을 둘러보고 그것들이 민족성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건물들을 무슨 피해지역의 가설막이나 격리병동처럼 들여앉혀놓았다고, 그것마저 관리가 되지 않아 남루하기 그지없다고 혹평했다.
2008년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사건 이후 남한의 관광이 중단되어 금강산 내 남한 시설들은 이미 11년 동안 개보수도 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 건물들을 북한이 최근에 건설하고 있는 삼지연군,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등의 세련된 현대식 시설들과 비교하면 매우 ‘낙후’되었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금강산 현지지도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통일부]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정은은 “당중앙위원회 해당 부서[통일전선부]에서 금강산관광지구의 부지를 망탕 떼여주고 문화관광지에 대한 관리를 외면하여 경관에 손해를 준데 대하여 엄하게 지적”했다.
김정은은 더 나아가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되어 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이처럼 남북관계 경색의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금강산에서 남한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으니 금강산관광이 더 이상 ‘남북화해협력의 상징’으로 남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향후 남북대화가 재개되더라도 그것이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해빙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북한은 향후 금강산관광지구의 남측 시설을 모두 철거한 후 삼지연군과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에서처럼 현대적이고 세련된 관광시설들을 건설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이 인접군에 관광비행장까지 건설하라고 지시한 것은 중국인 관광객의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이후 김정은은 개성공단에 대해서도 남측 시설물의 철거를 요구하고 독자적 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0월 25일 오전 북한이 통일부 앞으로 금강산관광 시설 철거 문제를 ‘문서교환방식’으로 논의하자는 통지문을 보낸 것은 철거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에는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경직된 태도에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관광이 대북 제재의 대상은 아니지만 미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량 현금(bulk cash)’이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그동안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므로 한국정부는 우리 국민의 신변안전보장을 조건으로 금강산에 대한 ‘소규모 관광’부터 먼저 허용함으로써 북한에는 금강산관광 재개 의지를 보여주고 국제사회에는 관광으로 북한에 ‘대량 현금’이 들어갈 것이라는 우려를 해소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고 김정은이 금강산의 남한 시설을 철거하라고 지시한 상황에서 갑자기 지금 한국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추진한다면 북한의 압박에 굴복하는 인상을 대내외에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금강산관광 재개보다 5.24 조치 해제 등 남북교류를 제한하는 조치들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남북교류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정은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훌륭히 꾸려진 금강산에 남녘동포들이 오겠다면 언제든지 환영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지금의 남한 시설들을 철거하고 새로운 시설이 들어선 후 남한 관광객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다. 정부로서는 당연히 우리 국민의 재산권 보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금강산관광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북한에게 남한 시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현재 북한은 과거에 현대아산이 금강산에 건설한 시설보다 나은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1년 이상 사용하지 않아 이미 상당히 노후화된 남측 시설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이산가족면회소를 제외한 금강산 내 남한 시설의 철거에 협조하면서 우리 국민에 대한 신변안전보장을 조건으로 개성과 백두산 등 금강산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제한적 관광 허용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과정에서 금강산에 투자한 현대아산을 일정하게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관광 대가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될 것이라는 과거 정권의 주장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것이었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광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보다는 무기수출과 북중경협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북한은 특히 무기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을 주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갑자기 대북 관광을 전면적으로 허용한다면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보다 훨씬 적은 ‘소규모 관광’과 민간교류를 허용하는 것으로 남북교류를 복원하면서 국제사회에는 관광 재개로 북한에 ‘대량 현금’이 유입될 것이라는 우려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올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과 스톡홀름 북미실무협상 결렬 이후 북미관계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소규모 대북 관광을 허용하더라도 북한이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강행하면 언제든지 관광을 중단할 것이라는 입장을 대내외에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은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시사한 바 있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조만간 신형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시험발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만약 한국정부가 한미 공조를 무시하고 성급하게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다면 이후 대내외적으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북한과 관계개선을 모색하되 한반도 정세가 더욱 악화될 경우의 대응 방안도 반드시 미리 수립해두어야 한다. 한국정부가 보다 유연하고 전략적인 대북 접근을 위해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라인을 부분적으로 쇄신하고 다시 한반도 문제의 ‘운전자’ 역할을 회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