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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전 일본총리의 서거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유지

등록일 2022-07-14 조회수 2,900 저자 이면우

                                                                                                                  아베 전 일본총리의 서거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유

 

[세종논평] No. 2022-04 (2022.7.14.)

이면우 세종연구소 부소장

mwlee@sejong.org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불의의 총격사건으로 지난 78일에 서거했다. 향년 67. 근대일본에 내각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장기간인 8년 이상(통산재직일수, 3,188)의 재임기간을 기록한 최장수 총리로서 이름을 남기게 됐지만, 요즘으로서는 아직 한창의 나이라고 할 수 있는 때이기에 애석하다. 특히, 비록 한국에서는 그의 보수적 또는 우익적 행보가 한일관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미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긍정적인 평판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의 정치가로서 일본의 국익과 안보를 최대한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고, 앞으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역할을 기대할 수도 있었기에, 본 고를 빌어 한일관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리더십이 보여줄 수 있었던 가능성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자 한다.

 

아베 전 총리는 1982년에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37세인 1991년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부친의 지역기반을 이어받아 1993년의 제40회 중의원의원총선거에 나서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외조부인 기시 전수상과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라는 화려한 가족력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정당적 정치역정은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당선된 1993년의 총선거는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자민당의 대패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추진된 자사사’(自社)연립정권 및 무라야마 내각의 수립 등에 아베 전 총리도 적극 동참하게 됐던 것이다. 또한 고이즈미 전 수상과의 관계 속에서 젊은 나이임에도 이례적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발탁되고, 이후 관방장관을 거쳐, 2006년에는 총재 및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고속성장을 보여주었지만, 연속되는 정치스캔들로 2007년의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대패하여 결국 1년 여만에 사퇴해야 했다.

 

이는 특히 자민당이 다시금 집권정당의 자리를 잃게 되는 시초를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사정으로 2012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그가 다시 등장하여 당선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의 재임기간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 일본에서의 최장기간을 기록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따라서 아베 전 총리의 이러한 성공에는 가문의 후광이나 귀공자 이미지 외에도, 상기의 정치여정에서 보듯이, 실패 또는 곤궁한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가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에 더하여 이질적일 수 있는 정공법과 친화력을 아우르는 성실한 리더십도 제기된다. 일시귀국한 일본인 납치자의 복귀에 반대했던 예와는 달리, 고이즈미 내각에서 우정사업문제로 탈당한 의원들을 자민당에 복당시킨 사례에서 그러한 양면적 리더십의 측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2012년의 총재선거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됐던 정공법 위주의 이시바 전 간사장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와도 연결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아베 전 총리의 정책적 행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정책적 성향 및 리더십 스타일을 소개할 수 있다. 첫째는 역시 단심(丹心)의 애국주의 또는 국가주의적 성향이다. 2006년의 자민당 총재선거 직전에 출판한 아름다운 나라로2015년의 전후 70주년 담화에서 나타나듯이, 마치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보는 듯한데, 조국 일본 및 그 근대사의 성공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단순하지만 선명히 드러난다. 정책적인 예로는 무엇보다도 애국심을 강조하는 교육기본법의 개정을 들 수 있다. 이는 60년대의 안보투쟁상황을 외조부인 기시 전 수상의 집에서 몸소 체험하며 얻은 성향이라고도 하겠지만, 경제성장 하의 일본만을 보고 자란 54년생의 전후세대로서 가지는 자부심의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군정에 의한 헌법의 개정이나 방위청의 성 승격을 추진하고, 납치자문제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는 등의 노력도 애국주의적 측면에 더하여 전후세대로서의 자부심이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정치가로서의 현실주의적 성향이나 실용주의적 성향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북한으로부터의 위협 증가에 대한 국제정치적 현실주의로 나타난다. 가중되는 중국이나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게 대응해야 일본이 힘의 공백으로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추진된 안보법제의 개정 및 제정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입장은 또한 실용주의 혹은 유연한 실리주의 노선과도 연계되어 있다. 2012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위안부문제와 관련해 제시된 고노담화의 폐기 주장이 취임후에는 철회된 것이나 2015년의 한일간 위안부합의에 대한 우파집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사시킨 배경에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 성향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센가쿠열도를 둘러싼 마찰로 대표되는 중국의 위협 증가에도 불구하고 제1차 내각에서는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만나고, 2차 내각에서는 시진핑 주석과 만나 일중관계의 유지 및 심화를 추구한 행보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의 근대사에 대한 그의 자부심 및 애정이 그러한 일본에 의해 근대를 식민지배로 시작해야 했던 한국이나 지대한 피해를 입었던 중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측면들이어서 갈등을 야기시키는 요인이 되지만, 이러한 현실주의적 실용노선은 그나마 한일관계와 일중관계의 개선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전후세대로서 제시되는 근대적 가치의 옹호나 신자유주의적이고도 다원주의적인 성향의 측면이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추진된 성역없는 구조개혁이나 세계 및 동아시아를 향해 지속적으로 열린 지역주의를 이어가고 유지하겠다는 입장에서 이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외교안보정책상 제1차 내각에서 제시됐던 아시아 게이트웨이 구상이나 제2차 내각에서 제시됐던 가치관 외교주장하는 외교등도 이러한 측면을 내포한다. 앞서 언급한 현실주의적 입장이 애국주의적 성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듯이, 전후세대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성향이나 다원주의적 성향 역시 그의 애국주의 및 국가주의가 내포한 닫힌 민족주의적 한계를 극복시키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아베 전 총리의 정책적 성향과 행보는 냉전의 종식을 알린 걸프전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 추진된 정국대국화, 또는 오자와 이치로 의원이 제시한 보통국가화를 실질적으로 추진하고 구현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는 아베 전 총리만의 것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본 고에서 한국에서는 보수적이고 우익적으로도 파악되어 비판받는 아베 전 총리의 정책적 행보를 구태여 이해하고자 시도한 배경에는 첫째, 현재의 냉전후 또는 탈냉전기적 상황이 미중갈등의 심화나 우크라이나 사태로 또 다른 레벨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와 같은 전환기적 상황에서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적 움직임이 난무할 가능성이 일본을 위시한 세계 각국에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 분출하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를 현실주의적 실용노선과 신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아우른 융합적 리더십이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어디에서든 요구되는 상황이요 시기라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아베 전 총리가 보여준 리더십의 측면이 앞으로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 예상했던 소이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명복을 빌며, 그가 보여준 리더십에 대해 비판에 앞서서 그 긍정적 측면이 계승되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한일 양국의 노력이 모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과거를 비판적으로 되새기는 이유는 비판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듯이, 긍정적인 부분을 발췌하는 것은 찬양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 본 고의 심사에 참여해주신 평가자들의 지적 및 조언에 감사드리며, 내용에 대한 시비는 필자의 몫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