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북한 신년사와 미북관계 전망
이상현(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
북한의 2018년 신년사가 발표되었다. 김정은이 직접 육성으로 발표한 금년도 신년사는 크게 보면 세 가지의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에 대한 메시지로서,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했다고 자평함으로써 핵무력 완성을 기정사실화했다. 특히 신년사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사정권 안에 있음을 거론했다.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있다는 것은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핵무기 양산, 실전 배치 본격 추진을 선언하는 한편, 나름대로의 핵독트린도 제시했다. 핵무기의 선제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을 천명함으써 북한은 이제 사실상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에 대한 메시지다. 금년 신년사에선 작년과 달리 핵무기에 비해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이 크게 증대됐다. 특히 평창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대표단 파견 의향이 있고 이를 위한 남북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는 핵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제 대남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는 인식을 반영한 ‘평화공세’로 보인다. 북한은 그러는 한편 ‘우리 민족끼리’를 다시 강조하고 외세배격을 주장함으로써 한미관계를 이간질 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압박에 몰린 북한이 한국을 앞세워 통남봉미(通南封美)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 주민들을 향한 대내용 메시지로서, 다가 올 제재에 대한 인민들의 대비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이번 신년사에 경제 분야 성과를 길게 언급하고 경제에 대한 언급이 핵보다 훨씬 많은 것은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와 함께 북한 내부의 사상적 단속 강화도 시사했다.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온갖 잡사상과 이중규율”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는 이제 핵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해서는 선제공격 억제를, 한국에 대해서는 평창 올림픽을 빌미로 한 평화공세를,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향후 지속될 제재와 압박에 대비한 체제결속이라는 삼중의 의도를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8년 북한 신년사에 비춰볼 때, 미북관계는 순탄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북한의 입장은 미국의 대북정책과 충돌 가능성이 커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트럼프 정부의 기본 시각은 ‘힘을 통한 평화’다. 김정은은 이제 북한의 핵능력 때문에 트럼프가 전쟁을 걸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핵은 미국의 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북한 신년사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나도 핵버튼 있다... 내 것은 더 크고 강력하며 작동도 한다”는 트럼프의 트윗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정은 신년사 발표 이후 미 국무부는 대북 압박 정책에 변화가 없으며, 남북대화나 관계개선은 반대하지 않지만 비핵화라는 분명한 전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현재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은 ‘최대의 압박과 관여’로서, 억지 및 봉쇄와 병행해 글로벌 압박 캠페인(global pressure campaign)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정책의 이면에는 그동안 추진해온 대북 제재가 이제 효과를 내기 시작했으며,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친북 국가들 상당수도 제재에 동참했고, 중국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오면 북핵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는 인식이 깔려 있다.
국가 핵무력을 완성했다는 김정은의 생각은 최근에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첫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의 인식과도 크게 대비된다. 트럼프의 첫 NSS 보고서는 ‘미국 우선주의’ 국가전략을 주장하며 원칙 있는 현실주의(principled realism)를 기본 철학으로 내세웠다. 이에 의하면 역사의 변함없는 연속성은 결국 힘의 대결(contest for power)이다. 보고서는 현재 미국이 직면한 세 가지 종류의 도전을 첫째, 중국, 러시아 같은 현상타파(revisionist) 세력, 둘째, 이란, 북한 등 불량국가들, 셋째, 지하드 테러조직으로 대표되는 초국가적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힘을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핵공갈에 굴복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북핵 위협이 가시화될수록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 가능성은 증대할 것이다. 그에 따라 한반도에서 어떠한 형태의 군사행동에도 반대하는 문재인 정부와의 조율 문제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트럼프가 전쟁을 걸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북한의 착각일 뿐이고, 오판에 의한 무력충돌의 가능성만 커질 뿐이다.
김정은의 신년사 이후 한국의 대북정책 고민도 깊어질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북한 비핵화 희망은 갈수록 사라져가는 형국에 향후 북한과의 협상은 무엇을 위한 협상이 돼야 하는지, 대북정책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딜레마 상황이다. 그동안 우리가 견지해온 대북정책의 핵심 전제 두 가지―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가 가능하고, 비핵화된 북한과 평화적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미북관계의 험로는 한미동맹에도 부담을 줄 것이다. 지금 논의되듯이 한미군사훈련을 평창올림픽 이후로 연기한다 해도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평창올림픽 참가를 빌미로 북한이 내밀 과도한 청구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비핵화 진전 없는 남북관계 개선이 한미관계에 불러올 후폭풍은 대책이 있나?
현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전략적 목표와 전술적 대응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비핵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하며, 일시적인 남북관계 개선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을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끊임없이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적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한다면 좋지만 거기에 너무 목을 맬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한국이 앞장서서 국제적인 대북 압박전선을 약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