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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포커스] 트럼프 2기 NSS는 포스트-패권 시대의 출발점인가?

등록일 2025-12-30 조회수 54 저자 이상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탈냉전 이후 약 30년간 유지된 강대국 간 상대적 평화의 종식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새로운 냉전(New Cold War)’의 초기 단계에 진입했으며, 향후의 국제질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트럼프 2기 NSS는 포스트-패권 시대의 출발점인가?
2025년 12월 30일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shlee@sejong.org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탈냉전 이후 약 30년간 유지된 강대국 간 상대적 평화의 종식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새로운 냉전(New Cold War)’의 초기 단계에 진입했으며, 향후의 국제질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정립된 규칙기반의 국제질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고, 국제질서는 현재 거대한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2025년 국가안보전략(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은 그러한 변화의 본격적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세계는 미국 패권의 시대에서 포스트-패권의 시대로 전환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 트럼프 NSS 내용으로 본 국제질서 변화
      트럼프 2.0 NSS는 과거 역대 행정부들의 NSS에 비해 매우 파격적이다. 그러한 파격의 전조는 이미 2017년에 발간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NSS에도 잘 반영돼 있다. 2017년 NSS는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당선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n First)’가 반영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로서 관심을 끌었다. 트럼프 2기 NSS는 1기에 비해 더욱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 기조와 함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의 열렬한 지지 속에 돌아왔다.

      미국이 NSS 보고서를 발간하는 목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행정부의 국가안보 전략 비전을 의회와 공유하고, 이에 소요되는 예산 요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행정부의 전략적 비전을 해외 관련국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국내 지지자들 및 정파를 상대로 대통령의 어젠다를 소개하고 일관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 행정부 내 외교, 국방을 담당하는 기관들 사이의 내적 공감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 대통령의 전반적인 어젠다 내용과 메시지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비춰본다면 트럼프 2.0 NSS는 역대 행정부들의 NSS에 비해 현격한 대조를 보여준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미국 우선주의의 제도화, 경제안보 중심의 패권 전략, 동맹의 역할 확대 요구, 중동·유럽 부담 축소와 아시아 중시 구도 강화 등의 특징을 갖는 매우 이념적·정치적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국내 역량 회복을 전략 중심에 배치하고, 중국을 장기·체계적 경쟁자로 상정하며, 국제체제의 현실적 제약을 반영한 우선순위 재조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전략적 전환점을 보여주는 문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 2.0 NSS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우선 기본 세계관은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의 복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규범보다 힘, 동맹보다 거래, 가치보다 국익을 앞세운 것이 역대 정부들의 NSS 보고서에 비해 파격적이다. 그와 함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두드러진다. 규범·제도 중심의 규칙기반 질서(rule-based order)를 이상주의적이며 미국의 부담 과중 구조로 인식한다. 미국은 동맹과 적 모두에게 뜯기며(ripped off) 살아왔다는 트럼프의 인식이 반영돼 있다. 기본적으로 국제질서는 강력정치(power politics)의 장이라는 현실주의적 인식을 깔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제도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맹, 다자기구, 규범도 미국 국익에 기여할 때만 유지되며, 전략·경제·기술 전반에서 거래적 접근(transactional approach)이 강화된다.

      2025 NSS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미국의 전략 중심을 서반구(미주 대륙)로 재전환하고, 먼로독트린을 재해석한 ‘트럼프 코롤러리(Trump Corollary)’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서반구 우선’과 세력권 경쟁 심화가 예상된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유럽과의 관계일 것이다. 2025년 NSS는 유럽에 대한 ‘동맹 피로’와 ‘유럽 자율성’ 확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유럽 동맹국들을 “방위비·이민·표현 규제 문제에서 미국에 짐을 지우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유럽의 문명적·정치적 복원을 거론하며 유럽이 ‘문명적 소멸’ 위기에 처했다고 규정했다.

      2025년 NSS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혼재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의 실제 국익과 능력(경제력, 군사력, 기술력 기반)을 중심에 두고, 냉전 이후 변화된 세계에서 미국이 무작정 세계를 책임지려는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즉,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세계질서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는 말처럼, 특히 중동과 아시아, 서반구(미주) 중심으로 전략적 초점을 재조정함으로써 과거 수십 년간의 ‘과도한 개입’에 대한 반성과 함께 패권 유지보다는 미국의 지속 가능한 안보 확보라는 현실주의적 방향으로의 조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번 NSS는 해외 주둔 미군 규모 감축, 중동 개입 축소, ‘부담 공유(burden-sharing)’ 및 ‘부담전가(burden-shifting)’ 강조를 통해 과도한 방위비 및 지속적 군사 개입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반면에, 트럼프 2.0 NSS는 전략이 지나치게 당사자 중심(개인화)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번 NSS를 단순한 외교안보 기조 문서로 보지 않고, 대단히 당파적이고, 내향적이며, 매우 ‘개인화된 선언(personal manifesto)’으로 본다. 즉 미국 전체의 전략이라기보다는 트럼프 2기 재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이번 NSS는 전후 미국이 맡아왔던 글로벌 민주주의 수호자나 국제질서 관리자(글로벌 리더)로서의 책임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유럽에 대해선 정체성 붕괴, 문명말소적 위기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심지어 유럽 내 우익·민족주의 정당을 사실상 지지하거나 조장하려는 듯한 문구도 포함됐다. 이런 대목은 기존 동맹국들 사이에서 친우익, 극우 성향으로의 정책 전환 우려를 낳는다.

      이하에서는 특히 트럼프 2.0 NSS가 시사하는 국제질서와 관련된 측면을 몇 가지 이슈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트럼프 NSS는 국제질서의 성격 변화를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 국제질서, 혹은 규칙기반 국제질서에서 이제는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기반한 경쟁적 질서가 보편화될 것이다. 우선 민주주의·인권·다자주의처럼 그동안 미국 외교의 중심을 차지해왔던 어젠다들이 보조적 가치로 밀려나면서 규범 중심 질서는 후퇴할 것이다. 앞으로는 국제규범보다 국가이익, 국력, 거래적 성과가 우선시되면서 규칙기반 질서보다 ‘억지와 협상에 의한 질서’가 강조될 것이다. 가치기반 외교에서 성과기반 외교(outcome-based diplomacy)로 외교의 중점이 변하면서 국제질서의 도덕성 탈색은 뚜렷한 추세를 이룬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맹국·우방국도 가치 공유보다 기여도 및 부담 분담으로 평가될 전망이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해체가 아니라 ‘기능적 무력화’에 가깝다.

      둘째, 강대국 관계는 중국, 러시아와의 경쟁을 가장 중요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특히 미중관계는 관리된 경쟁에서 장기적·구조적 적대 경쟁으로 전환했다. 중국은 더 이상 ‘도전국’이 아니라 체제 경쟁자이자 전략적 위협으로서 기술·군사·산업·금융 전 영역에서 장기적인 경쟁의 대상이다. 중국과의 경쟁 방식은 전면 충돌은 회피하는 한편 지속적 압박을 유지한다. 핵심 기술, AI, 반도체, 에너지 등 분야를 중심으로 탈동조화(decoupling) 또는 강화된 디리스킹(de-risking)이 지속될 것이다. 결국 미·중 경쟁은 완화 국면 없이 항구적 경쟁 상태로 고착될 것이다. 중국에 비해 러시아는 장기적 체제 경쟁자라기보다 지역적 군사 위협으로 인식된다.

      셋째, 세계경제 질서는 세계화 추세가 둔화 혹은 퇴행하고 블록화 현상화 더불어 거래적 경제질서가 보편화될 전망이다. 자유무역보다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가 우선시되고 공급망은 효율성보다 신뢰성·동맹성이 우선이다. 그 결과 그동안 세계경제의 비약적 발전에 한 원인을 제공했던 세계화는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의 제도화로 굳어질 것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세계화가 더 이상 확장·발전되지 않고, 느려지거나 정체·후퇴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비틀어 만든 용어다. 자유무역 체제를 지원했던 WTO·IMF 등 다자체제의 영향력은 추가적인 약화가 불가피하다. 거래적 경제질서에서 동맹국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동맹과 우방을 평가함에 있어서 시장 접근성과 안보 기여, 정치적 충성의 패키지화 잣대를 적용할 것이다. 향후 글로벌 시장은 단일 공간이 아니라 ‘정치화된 복수(複數)의 시장’으로 분절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 동맹 질서는 가치 동맹에서 비용·역할에 기반한 계약 동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동맹은 자동적으로 방위의 책임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기여·부담·역할을 명시한 안보 계약 동맹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일본, 유럽 등 미국의 전통적 동맹에 대한 시그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동맹들은 방위비 분담 증액 압박과 더불어 전략적 자율성 확대 요구—특히 핵·미사일 방어·산업기반—에 직면해 있다. 이제 미국의 동맹은 미국을 도와주는 동맹이 아닌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동맹’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동맹체제는 유지되겠지만 신뢰의 질은 더욱 불안정해질 전망이다.

      다섯째, 핵질서와 안보 환경은 전략적 안정성 중심에서 억지 경쟁으로 변하면서 비확산 체제(NPT)는 형식적으로 유지되지만 실질적 구속력은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핵·미사일 위협인식 변화에 따라 군비통제·전략적 안정성 담론은 후퇴하고, 대신 우위 확보와 억지 신뢰성이 강조된다. 다만 미국이 동맹과 우방들에게 제공하던 확장억제는 자동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군사·재정적 대가와 연계되는 거래화가 일상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여섯째, 미국이 스스로 패권국의 지위에서 내려옴으로써 글로벌 거버넌스의 퇴조는 불가피하다. 2차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던 UN, WHO, WTO 등 국제기구의 위상은 하락하고 다자주의는 주변화되는 추세다. 미국은 국제기구를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경우에만 선택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이는 미국이 규칙기반 국제질서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상존함을 의미한다. 질서 관리 방식도 기존의 국제기구나 제도 중심의 관리에서 양자 협상과 힘의 균형을 통해 이뤄지게 될 것이다. 규칙기반 국제질서 및 글로벌 거버넌스의 약화로 향후 세계질서는 ‘관리되는 무질서(managed disorder)’ 상태로 진입할 가능성이 커졌다. 결국 트럼프 2기 NSS가 그리는 세계는 규칙이 아니라 ‘힘과 거래’가 질서를 만드는 세계이며, 모든 국가는 각자도생을 기본 전제로 전략을 재설계해야 하는 질서이다.
    | 포스트-패권 시대 국제질서의 성격
      이상에서 논의한 국제질서의 변화는 크게 보면 2차대전 이후 정립된 미국 주도의 패권질서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다극화 질서로의 전환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에 붙일 만한 슬로건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을 다시 지역 강국으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패권국으로 전 세계에 걸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화를 촉진하며 국제기구를 포용하고 지구촌의 부담을 떠맡아온 미국의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

      트럼프 NSS는 미국이 국익을 훨씬 더 협소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과 아시아에도 약간의 국익이 걸려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익은 이웃인 서반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먼로독트린과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선언했던 루스벨트 코럴러리와 대단히 유사한 ‘트럼프 코롤러리’를 들먹인다. 트럼프 코럴러리란 고립주의를 골자로 한 먼로주의의 확장을 뜻한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최근 ‘미국 우선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활동 반경을 먼로 시대의 관점에 맞춰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단언한다. 미국의 뒷마당을 우선시하는 외교 전략은 워싱턴이 세계에서 경제적 중요도가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에 집중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먼로독트린을 발표했던 1823년 무렵의 시대와 지금은 현격히 다르다. 당시 미국은 보잘것없는 신생독립국으로서 유럽 강대국들이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식민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식민주의와 불간섭주의 원칙을 주창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역량을 지닌 국가다. 미국이 뒷전으로 물러서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책임감이 부족한 강대국들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한 세기 전 미국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자 국제체제가 붕괴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세계에는 여러 다른 안정화 세력이 존재하지만 미국이 자신의 뒷마당만 돌보려 한다면 세계는 방향타를 잃은 채 불안정과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포스트-패권 시대 국제질서는 어떤 형태로 전개될까? 캐나다 맥길대 T.V. 폴(T.V. Paul) 교수는 새로운 냉전의 성격을 ‘다극-다층(multipolar-multiplex) 냉전’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신냉전은 기존 냉전에 비해 미·중·러 등 강대국간 직접 충돌 가능성은 크게 줄었지만 강대국들은 여러 지역에서 대리·간접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 또한 구냉전에 비해 이념 대립은 훨씬 희석되었고, 경제적 상호의존은 탈세계화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높다.2)

      또 다른 특징은 인도, 브라질, 사우디, 인도네시아 등 중견·지역 강국의 부상이다. 이들은 자율성과 전략적 공간을 확대하며 진영 선택을 회피하는 한편, G20, BRICS, SCO 등 교차적 제도는 냉전적 양분화를 어렵게 만든다. 강대국이 아닌 다수 국가들은 강대국 전략경쟁 속에서 헤징(hedging) 전략을 구사하면서 생존을 도모한다. T.V. 폴 교수는 이러한 질서를 다극적이면서도 다층적인 냉전 질서로 규정한다. 향후 미·중 격차가 크게 벌어질 경우, 이중-다극적(bi-multipolar) 질서로 진화도 가능하다.

      이러한 복합적 국제질서가 대두되는 요인 중 하나는 강대국 경쟁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침식이다. 좀 더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지역 불안정만 심화시키며 단극 패권의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과 영토 병합으로 영토주권의 보전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중국은 일대일로(BRI) 중심의 지경학 전략을 통해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효과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추세를 부추기고 있는 건 트럼프 행정부의 신제국주의·신중상주의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무역, 투자, 안보를 거래적·강압적 수단으로 활용하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약화 또는 해체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또한 외교에 있어서 이념이나 가치보다는 미국의 이익과 지위 회복(status restoration)을 우선시하는 거래적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또다른 변화의 요인은 비(非)강대국의 전략적 행위자성이다. 중견국과 지역 강국은 더 이상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들은 강대국 경쟁을 활용·조정·제약해 왔으며, 오늘날 그 전략적 자율성은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아미타브 아차랴(Amitav Acharya)는 서구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쇠퇴하는 배경과 그 이후 전개될 다원적·분산적 세계질서를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3) 그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보편적이었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아차랴는 전후 국제질서가 흔히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서구 경험을 보편화한 편향된 서사였고 비서구 세계의 역사·규범·제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오늘날 흔히 말하는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위기는 단순한 미국 패권의 상대적 쇠퇴가 아니라, 질서 자체의 설계 결함과 대표성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아차랴는 5천 년에 걸친 세계사를 조망하며, 서구의 부상 훨씬 이전부터 국가 간 협력과 평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구조인 세계질서가 존재했음을 밝혀낸다. 고대 수메르, 인도, 그리스, 메소아메리카에서 중세 칼리프국과 유라시아 제국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차랴는 인도주의적 가치, 경제적 상호의존성, 국가 간 행동 규범이 수천 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역사는 서구의 퇴조 속에서도 질서가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서구 지배의 종식은 비서구 국가들이 더 큰 발언권과 힘, 번영을 누리는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는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나머지 세계와 협력하여 보다 공정한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이 책은 세계 질서가 어떻게 진화해왔으며 서구의 쇠퇴 속에서도 왜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결정적 설명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패권 이후 세계질서는 어떻게 변할까? 아차랴가 말하는 국제질서의 핵심 개념은 멀티플렉스 세계질서(Multiplex World Order)이다. 멀티플렉스 질서의 특징은 단일 규칙이나 단일 리더의 부재다. 이 질서에서는 미국·중국뿐 아니라 중견국, 지역기구, 비서구 국가가 동시에 질서 형성에 관여한다. 하나의 스크린(미국 중심 규범)이 아닌 여러 스크린(다양한 규범·제도·질서)이 동시에 상영되는 것처럼 다른 규범과 규칙이 공존하는 상황으로서, 보편주의(universalism)보다 다원주의(pluralism)가 강조된다. 이 질서는 ‘포스트-미국’ 질서가 아니라 비서구가 참여하는 ‘포스트-서구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국가들은 상황과 이익에 따라 서로 다른 규범과 제도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아차랴는 미국 패권의 후퇴를 ‘질서 붕괴론’과 연관짓는 것을 경계한다. 즉, 미국의 상대적 영향력 감소가 곧바로 무정부·혼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지역 수준의 질서(regional orders)가 강화되는데, ASEAN, 아프리카연합, 중동·남미 지역 메커니즘 등 글로벌 거버넌스는 분산·중첩·중복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보면 국제질서는 붕괴가 아니라 재구성(reordering)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 국가들은 ‘규칙 수용자(rule-taker)’가 아니라 ‘규칙 공동 창출자(rule-maker)’로 재정의된다. 예를 들면 아시아·아프리카의 역사적 규범인 식민지 경험에서 형성된 주권·비간섭 원칙은 지역적 관행과 제도의 글로벌 확산에 기여했다. 이 순간에도 국제질서의 미래는 워싱턴, 브뤼셀만이 아니라 자카르타, 뉴델리, 아디스아바바에서도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 포스트-패권 시대,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포스트-패권 시대의 국제질서가 한국처럼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에게 주는 전략적 함의는 매우 크다.

      첫째, 많은 이들이 포스트-패권 시대 국제질서의 혼란을 우려한다. 하지만 미국 패권의 후퇴를 규칙기반의 질서 붕괴, 곧 혼란의 시대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미국 패권 시대 이전에도 질서는 존재했다. 실상 인류 역사에서 항상 어떤 형태로든 질서는 존재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패권의 퇴장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안보질서와 경제질서 등 여러 가지 체스판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오는 상황의 복합성에 따른 전략적 고려의 복합화를 준비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한국도 이제는 안보와 경제를 포괄한 복합적 국가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 포스트-패권 시대는 중견국 행위자성(agency)의 확대를 위해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세계가 미중러 사이에서 세력권으로 쪼개지는 것은 강대국이 아닌 국가들에게 도전과 동시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강대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선택의 압박, 방기와 연루의 위험 증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중견국들의 agency 강화를 위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글로벌 패권질서에서 지역 차원의 질서가 더 중요한 시대로의 전환은 지역 차원의 중견국들에게는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미 중견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이나 인지도가 높으므로 이러한 위상을 적극 활용해 국익 위주의 실용적 대외전략을 펼쳐야 한다.

      셋째,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미국 없는 규칙기반 질서, 미국 없는 자유무역 체제를 위해 노력할 때이다. 향후의 세계질서는 강대국들이 질서 유지에 별 관심이 없는 ‘G-마이너스 시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에게는 규칙기반의 질서가 그나마 좀 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질서다. 따라서 미래를 향한 최선의 선택은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새로운 규칙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무정부적 무역 시스템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현상유지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글로벌 경제가 완전한 다자간 규칙기반 무역질서에는 못 미치는, 다자간 무역 시스템보다는 작을지라도 더 유연한 개방적 다자관계(open plurilateralism)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미국의 패권적 리더십이 없더라도 다자적 협력은 가능하다. 단, 다자협력 국제질서를 선호하는 국제체제는 그 핵심 멤버들-유럽, 일본, 한국 등-이 선제적으로 단합할 경우에만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5)
     

     
    1) 파리드 자카리아, “우려스런 트럼프의 먼로독트린 향수,” 『서울경제』, 2025.12.26. (https://www.sedaily.com/NewsView/2H1VODCIKP/GG03).
    2) T.V. Paul and Markus Kornprobst (Eds.), The New Cold War and the Remaking of Regions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25)
    3) Amitav Acharya, The Once and Future World Order: Why Global Civilization Will Survive the Decline of the West (Basic Books, 2025).
    4) Michael B. G. Froman, “After the Trade War Remaking Rules From the Ruins of the Rules-Based System,” Foreign Affairs, September/October 2025 (https://www.foreignaffairs.com/united-states/after-trade-war-michael-froman).
    5) Ngaire Woods, “Order Without America: How the International System Can Survive an Hostile Washington,” Foreign Affairs, May/June 2025 (https://www.foreignaffairs.com/united-states/donald-trump-order-without-america-ngaire-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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