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북관계 인식의 질적 변화 가능성과 향후 과제
조경환 (전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kwhan80cho@gmail.com
들어가며
올해로 6·25 70년이고, 정전 67주년이다. 2018년 들어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과 9·19 평양에서 공동선언, 미국과 북한 정상의 6·12 싱가포르합의는 2019년 2월 28일 하노이 ‘노딜’에서 그 진행이 멈추었다.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이다. 북한 비핵화 협상은 퇴행하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요지부동이다. 남북관계는 연동되어 교착이다. 코로나까지 겹쳤다. 남북교류의 작은 틈을 만들고 싶어도 그마저 실행이 막상 쉽지 않아졌다.
남북 간의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사회심리적인 거리는 더 멀어졌다. 김정은 정권이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김정일 시대와는 달라졌고, 남북한 공히 젊은 세대의 통일관은 예전과 다르다. 과연 북한 시각에서 한국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고, 한국은 또 북한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까. 남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된 대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특수성이 그대로 유효한가. 아니면 남북관계도 보통 국가 간의 관계라는 보편성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남북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타성에 너무 오래 젖어 있는지 모른다. 현실 인식을 엄중히 해야 한다. 그래야 그에 적합한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
남북관계 특수성의 종언
남과 북의 정치체계(polity)에 대한 상호 인식변화의 흐름은 그간 남북 간 합의문에 그 단초가 있다. 최초의 공식 합의 문건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는 그 주체가 서울과 평양이다. “온 민족 앞에 약속” 및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한 민족성을 담고 있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지 석 달만인 1991년 12월 13일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특수관계로 규정,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통일이 민족 과제임을 명시했다. 합의의 주체로는 남과 북, 남측의 대한민국과 북측의 국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용하였다. 과도기를 거친 셈이다. 남북의 최고책임자가 비준한 최초의 정부 간 포괄적 합의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에 와서 최초로 국명이 서명 란 뿐 아니라 본문에까지 들어갔다. 통일문제는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하자고 명문화했다. 당시의 햇볕정책과 맞물려 민족성을 부각했다. 북한의 통일전선전술 일환이라는 해석도 유력하다. 이후 정식 국호는 2007년 10·4 선언문과 2018년의 두 차례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물론 정치체계가 외형상으로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질적으로 변화했다고 단정 짓지는 못한다. 남북교류는 여전히 특수성을 바탕으로 하여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왔다. ‘북한이 무력통일의 뜻을 접었다’는 그 내면을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런데 최근 일부 학자들이 남북관계 특수성의 종언을 예언하여 이목을 끈다.
동국대 박순성 교수는 ‘한반도’라는 공간 단위가 지정·지경학, 미래학, 감염·방역학, 정책학 차원에서 정당성이나 존재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분단체제에서 남북한의 궁극적인 통합의 비전을 담고는 있지만, 실천적 현실에서는 ‘한반도’ 공간의 단위성이 증발하고 그 의미가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시대에 접어들어 북한 지도부는 남한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고, 남한 내의 여론도 ‘남북은 하나다’를 설득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코비드-19가 더 이상 한반도는 하나의 지정학적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역사적 계기로 작동”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정책기획위원회 토론, 2020.6.4.)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보수와 진보진영이 각각 이념과 민족을 근거로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잘 못 이해해 왔고, 그것이 남북관계의 패착이라고 본다. “특수관계라는 민족주의에 매몰돼 애정과 증오, 접근과 적대를 단속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없다”며 보편주의에 기반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주장한다 (한겨레신문, 2020.6.22.).
서울대 박태균 교수도 “남북관계는 국가이익에 기초한 일반외교와는 다르지만, 같은 점을 찾기보다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2020.7.8.).
최근 남북관계 인식의 질적 변화 징후: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남북관계를 인식하는 기제의 질적 변화는 북한 쪽에서 찾는 것이 빠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이른바 사회주의 정상국가화(party state system)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 당 규약과 헌법에 의거, 당과 국가기구의 선거·회의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지침·지시는 예외 없이 회의체를 통해서 나온다. 2013년 3월의 ‘경제발전·핵무력 병진 노선’, 2018년 4월 ‘경제건설 집중 노선’, 2020년 ‘자력갱생, 정면돌파전’과 같은 국가 정책의 방향성은 모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했다. ‘핵무력’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당면사업이나 중요 정책적 문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정무국 회의체가 작동한다. 김 위원장이 올 6월 23일 김여정 제1부부장이 건의한 대남 군사행동을 보류한 것도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라는 회의체를 통해서였고, 팬데믹 와중에 화상회의로 진행했다. 김 위원장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두 차례 마주 앉아 정상회담을 하고 한 차례 회동한 점도 정상국가, 보통국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이다.
김정일 시대의 ‘우리민족제일주의’에서 김정은 시대의 ‘우리국가제일주의’로 변화는 눈여겨 볼만하다. ‘우리국가제일주의’는 2017년 11월 29일 ICBM인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 시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포하면서 노동신문 사설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정상회담을 통해서 대외 교류협력 가능성이 높아진 2018년 하반기부터 국가 상징의 강조가 두드러졌다. 건국 70주년인 ‘9·9절’의 집단체조와 공연(‘빛나는 조국’)은 그 개념을 구체화하는 수단이다. 국수·국견·국조·국화를 부각하고, 국호·국장·국기·애국가를 언론에 자주 노출하여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일상화해 가고 있다. 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우리국가제일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2019년 4월 개정 헌법 서문에는 사회주의 ‘조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어 국가성을 분명히 했다.
통일연구원 이지순(2019: 5)은 “‘우리 국가제일주의’의 문화예술적 표상과 시사점” 연구에서 국가성의 강조는 미국 본토에 다다를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결렬은 됐지만 남한 및 미국 정상과 북핵 협상을 했다는 국가의 위대성을 담을 콘텐츠가 필요한 데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고난의 행군’ 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민족 정체성은 약화되는 반면 시장화가 확대되면서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왔다. 외부 문물의 유입도 가속화된다. 종래의 민족주의로는 주민을 잡아둘 수 없다는 판단을 북한 정권이 내렸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 상징은 김정은 시대의 국민 정체성을 재구축하여 정상국가의 면모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민족 내부인 남한에 대해서도 협력의 대상자라기보다 경쟁상대로 보며, ‘핵무력’의 힘을 바탕으로 갈 길을 가겠다는 ‘두 개의 조선’ 전략을 가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대남사업 및 외교안보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김여정 제1부부장이 올 6월 4일-17일 간 세 차례 연속 담화를 내고, “대남사업을 대적 사업으로 전환” 혹은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며 관계의 단절을 반복적으로 공언하는 것은 지금의 젊은 지도부가 선대와는 다른 대남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코비드-19는 남북교류의 단절과 고립을 키우고 있다. 김 위원장은 7월 25일 탈북자가 개성으로 월북한 데 대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상확대회의를 소집, 국가 비상방역체계를 최대로 올린 데 이어, 8월 13일 수해 피해에 관한 외부의 지원을 금지했다. ‘자력갱생과 정면돌파전’ 속에 남북 간의 거리도 더 멀어질 것을 예고한다.
남한 역시 통일에 대한 인식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한반도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민족의 관점에서 보던 것을 국가 간의 보편적 관계로 접근하는 시각이 늘고 있다. “남북 간 통일을 하지 않더라도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만 있다면 통일이 필요 없다”는 인식이 젊은 세대일수록 강하다. ‘2020년 통일의식조사’(통일연구원, 5.20-6.10)에 따르면, 전쟁을 경험한 70대 이상은 평화공존 45.6%·통일 36.7%이지만, 30대는 55.9대 19.3, 10대·20대는 63.6대 17.9로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6·25 전쟁 70년 기념식 연설에서 남북 간 체제경쟁은 끝났다면서 북한에 우리 체제를 강요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평화를 통해 남북 상생의 길을 찾아낼 것이며, 통일을 말하기 전에 사이좋은 이웃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두 개의 한국’이 우리 국민 뇌리에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한 언명일 것이다.
남북관계의 보편성이 지닌 함의와 향후 과제
북한의 국가성 회복 노력과 우리 내부의 보편적 관계 지향심리는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에 맞닿을 수 있다. “북한이 원하는 남북관계는 ‘민족 공조’가 아니라 국가 간 협력의 대등한 파트너십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이 남북 간에 정서적인 동의기제인 것은 여전하나, 시혜적 태도는 이익 추구의 교류에서는 역효과가 난다” (이지순, 2019: 26). 남한의 경우도 남북관계에서 특수성은 그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대북 ‘퍼주기’ 논란과 정치적 변동성을 키워왔다. 한편 국제적인 대북제재 역시 북한 비핵화 협상에 진전이 없는 한 남북관계에 보편성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첫째, 남북관계에서 보편성 추구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통일 담론과 민족 담론은 점차 퇴조하고 그 자리를 국가 담론이 대신해 가는 것이다. 보편적 관계를 외치면서 특수성으로 우회하여 풀려고 하는 것은 이제 잘 먹혀들지 않는다. 북한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는 오히려 우리 내부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해 교류의 지속성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특수성을 추구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보편성이 자리를 잡아야 하며, 특수성에 기반한 특권은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대북제재를 극복해 가는 것도, 대북 경협의 국제화를 도모하는 것도 국제적인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프로세스가 보편성에 입각해야 공감을 얻어 낼 수 있다.
둘째, 남북 정상 간 합의의 이행은 보편적 관계의 출발이자 바로미터이다. 지킬 수 있는 것만 합의해야 하며,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 남북 간에 좋은 합의는 이미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의 합의 내용을 복기하고 점검하여 이행할 것은 이행해야 마땅하다. 사전·사후 초당적 동의매커니즘도 확립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당사자 역할 정립은 사활적이다. 우리 독자안이 있어야하며 그것을 가지고 국민적 동의를 구해 놓는다면 협상의 좋은 ‘윈셋’(win set)이 된다.
셋째, 남북관계가 정권의 성향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 온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법과 절차에 의한 법치로 진행해야 한다. 정치군사적 요인과 경협과의 절연을 위한 제도화를 더는 미룰 수 없다. 1972년 이후 남북 간 합의서는 총 245개이며 161개가 발효되었다. 이 중 4대 경협합의서 등 13건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 발효되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 운영 등 11건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비준, 공포되었다 (통일부 자료 2018.4.4.). 기왕의 법제 인프라는 충분하다. 대북제재가 작동하고 북한도 외부지원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한건주의식의 대북 사업 성사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관련 법제를 다듬고, 낮은 단계의 양자무역의 시스템화를 강구하며, 남북 간 및 남한 내의 남북경협관련 거버넌스를 창안해 두는 것이 돌아가는 것 같아도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