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정세와 한-아세안관계
최윤정 (세종연구소 신남방협력센터장)
yjchoi@sejong.org
전 세계와 마찬가지로 아세안의 2020년은 코로나19의 위력을 실감한 한 해였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보건․의료에서 시작하여 정치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일자리가 증발하였으며, 국적․종교․소득 등에 따른 사회적 균열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아세안은 초기의 우려를 잠재우는 효과적인 대응을 통해 코로나19를 통제하고 이를 기회로 역내 보건의료 시스템을 재점검하는 한편 역외 파트너 국가들의 지원을 얻어냈다. 이에 더하여 2020년 11월 제37차 아세안 정상회의를 계기로 세계 최대 FTA인 RCEP의 최종 협상 타결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1년 아세안은 전년도의 유산으로 남은 각종 문제에 더하여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본격적인 체제경쟁에 휩싸이면서 통합과 분열, 성장과 정체의 갈림길에 놓이게 될 전망이다. 이에 본고는 아세안이 역내외에서 직면한 주요 문제점과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2021년을 전망하는 한편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시사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2020년 아세안 정치․경제 주요 이슈
아세안에서는 2020년 1월 13일 태국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후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되어 3월 25일 라오스에서도 확진자가 확인되면서 아세안 전역이 코로나19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표 1). 1) 확진자 수가 많은 국가들은 2분기부터 본격적인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표 2).
아세안 전역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됨에 따라 생산과 수요가 모두 위축되어 2020년 아세안의 경제성장률은 전년 보다 8.4%p 하락한 –3.8%를 기록할 전망이다. 국가별로 보면 코로나19 확산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통제한 베트남, 미얀마, 브루나이는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고, 태국은 –8.0%, 필리핀 –7.3%, 싱가포르 –6.2%, 말레이시아 –5.0%, 캄보디아 –4.0%, 라오스 –2.5%, 인도네시아 –1.0% 등 상당수의 경제가 큰 폭의 뒷걸음질을 쳤다. 실업률 증가와 소비심리 위축,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특히 관광업,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인 태국, 싱가포르의 타격이 더욱 컸다.
이에 아세안 개별 회원국 정부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다양한 재정지원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한편 아세안이라는 협의체를 통해 대화상대국을 비롯한 역외 파트너 국가들과 신속하고 다양한 대응방안을 마련하였다. 2020년 초부터 아세안 외교장관 및 아세안에 상주하는 대화상대국 대사위원회(Committee of Permanent Representative) 등과 함께 공중보건위기 실무그룹을 발족하고 포괄적 회복 방안(comprehensive recovery framework) 수립에 착수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와 ‘아세안+3 특별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코로나19 아세안 대응기금(COVID-19 ASEAN Response Fund)을 발족하고 의료용품과 필수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MOU도 체결하였다.2)
코로나19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정부에 힘을 실어주어 2020년 아세안은 예상된 일정에 따라 선거를 치루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은 비교적 순탄하였다. 먼저 말레이시아는 22년 장기 집권한 마하티르가 올해 2월 총리직 사임 후 재신임을 노리는 정치 승부수를 날렸지만 총리직은 무히딘 야신(Muhyiddin Yassin)에게 넘어갔다. 미얀마는 2020년 11월 8일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집권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상·하원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여 안정적으로 재집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했다. 싱가포르 역시 7월 10일 실시한 조기 총선에서 리셴룽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민행동당(PAP)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3) 인도네시아는 2020년 12월 9일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조코위 대통령의 아들과 사위의 시장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으나 선거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다.4)
2020년의 유산과 2021년 아세안 정세 전망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의 취약점이 노출된 아세안의 2021년은 국내정치적 불안정과 사회 균열이 심화되면서 아세안이라는 협의체를 이끌어가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5)의 가치를 지켜나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코로나19로 대량 실업과 경기 침체 등 사회적 혼란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말레이시아는 2월 재신임을 노리고 총리직을 떠났던 마하티르가 재임 도전을 시사함에 따라 무히딘 총리는 국가의 위기 대응에 집중하기 보다는 정치적 위기 대응에 보다 집중할 가능성이 있고, 인도네시아는 지방선거 후유증으로 2021년 다소의 혼란이 예상된다.
보다 큰 문제는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부각된 정치 체제의 약점과 사회 구조적갈등이다.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정부의 독재적인 리더십을 강화했다. 전염병 통제를 이유로 국가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는 정부의 위기 대응을 비판한 언론인과 연구자를 체포하였고,6) 태국, 싱가포르, 캄보디아는 ‘가짜 뉴스법’과 ‘사이버 범죄법’을 이용하여 COVID-19와 관련한 언론 정보를 통제하였다.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과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퇴역한 장성들이 주축이 된 COVID-19 대응팀을 운영했으나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면서 군부의 힘만 키워주었다.
사회적 균열도 심화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확진자 중 상당수를 차지한 324,000여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처우가 수면 위로 떠오른 한편 말레이시아는 이주 노동자 비난에 앞장섰고, 태국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와 같이 역내 다양한 돌출변수가 잠복한 상황에서 이제는 아세안을 둘러싼 미중간 경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럼프 집권기에는 거칠고 강한 언사에 비해 아세안이 받은 혜택이나 피해가 모두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의 여유시간은 지났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초기인 2021년 상반기까지는 자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나 하반기부터는 군사, 경제, 정치, 글로벌 거버넌스의 4가지 영역에서 중국을 미국의 운동장으로 끌어오려고 할 것이다.7)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동맹국, 우방국을 동원하여 중국을 사방에서 조이면서 서서히 중국을 미국의 방식대로 따라오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8) 미국은 환경, 인권, 노동, 반부패, 지적재산권 등 시장경제질서를 옹호하는 세련된 압박과 동시에 메콩강, 남중국해 등에서 중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군사, 외교적 공세를 병행할 가능성이 높다.9)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지점에 위치한 아세안은 정부와 기업이 모두 미중 무역전쟁 대리전에 내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아세안에게 단순한 선택의 문제만이 아니다. 남중국해 문제나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강력한 친중국 성향과 입장을 보여 온 캄보디아나 라오스의 회원국 자격에 대한 논의가 제기될 만큼 내부 분열의 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다분하다.10)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공동체 실현을 향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2021년은 아세안 공동체 목표 달성의 중요한 분깃점이 될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역내외 협력과 지원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어 아세안 협력에서 보건과 디지털 분야는 추가적인 동력을 얻게 되었다. 2020년 11월 15일에는 무역규모, 역내총생산(GDP), 인구 측면에서 전 세계의 약 3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FTA인 RCEP이 최종 타결되면서 아세안은 경제성장의 동력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2025 경제공동체 실현에도 한 발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2021년 초 아세안이 추구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아세안 정치안보공동체(ASEAN Political-Security Community, APSC), 아세안 경제공동체(ASEAN Economic Community, AEC), 아세안 사회문화공동체(ASEAN Socio-Cultural Community, ASCC) 별로 중간 실적을 점검하는 이행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아세안은 공동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간다는 각오다.
한-아세안 관계에 대한 시사점
미국의 귀환을 앞둔 아세안은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다. 역내에서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교역 상대 1~2위국인 중국에 등을 돌릴 것을 요구하거나, 환경, 인권, 노동, 민주주의, 지적재산권 문제 등을 들고 나오면 아세안은 매우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RCEP은 적과의 동침이다.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중국의 영향력과 무역적자를 고심하며 RCEP 협상에서 빠져나온 인도의 고민은 인도만의 고민이 아니다. 글로벌 가치사슬을 활용할 수 있는 터전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고 기뻐할 일은 맞다. 하지만 오용되어 중국의 공급망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은 회원국 모두가 경계하는 일이다. 한국 수출의 50%를 차지하는 RCEP에서 건전한 시장경제질서가 확립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은 한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세안은 특히 한국과의 협력에 우호적인데, 한국과 아세안은 본질적으로 상호보완적이다. 한국은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의 여타 주요 대화상대국인 일본, 중국, EU 등과는 달리 한국과는 양자간 의심과 불신이 없고 협력에 대한 기대도 증가하는 모습이다. 현재 아세안이 겪는 어려움은 한국 역시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 겪었던 것이고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한국은 아세안에게 레버리지가 되어주어야 한다. 이는 한국이 아세안의 번영, 그리고 한국과 아세안의 공동번영의 가치를 진정으로 인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여러 어려움을 헤치고 아세안은 2025 아세안 공동체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갈 것이다. 아세안의 3대 공동체 목표인 정치안보․경제․사회문화 공동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 한국 신남방정책의 3P(평화․번영․사람)이다. 한국 정부가 3P 아래 수립하고 있는 정책 목표와 세부 사업을 아세안의 공동체 목표 구현의 시각에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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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ASEAN Secretariat. 2020. ASEAN Rapid Assessment: The Impact of COVID-19 on LIvelihoods across ASEAN. ASEAN Sectariat, November 2020.
2) The ASEAN Secretariat 홈페이지
3)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가 설립한 인민행동당은 1965년 독립 이후 치러진 17차례 총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7월 10일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도 전체 93석 중 83석을 가져갔지만, 의석 점유율이 9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처음으로(89.2%) 집권당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4) 인도네시아 총선감시위원회(Bawaslu)는 12월 11일에 58개 투표소에는 재투표를, 48개 투표소에 대해서는 투표 재집계를 권고하는 등 선거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증폭되고 있다.
5)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는 동시에 중심적인 역할과 추동력을 갖는 아세안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이며, 아세안이 추구하는 지역 및 국제협력에서의 적극적이고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목표다(윤진표. 2020. 현대 동남아의 이해: 376).
6) 인도네시아에서는 정부의 혼란스러운 대응에 대한 실망의 표현으로 "Whatever Indonesia“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과학적 지식과 체계적인 지도 역량을 갖춘 정부에 대한 열망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The Diplomat 2020).
7) Lye Siang Fook, 2020. Sejong-KF 2020 ASEAN Partnership Seminar. 2020. 11.26.
8) 안성배 외. 2020. KIEP 오늘의 세계경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9) 미국은 '메콩 댐 모니터' 작전을 통해 위성을 이용해 메콩강 주변의 중국 댐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고 한편(Bloomberg. “U.S. Steps Up Scrutiny of Chinese-Built Dams on Mekong Basin.” 2020년 12월 16일), 지난 11월 21~23일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의 베트남과 필리핀 방문을 통해 각각 중국 제품의 우회 수출 금지와 미국과의 군사 협력 강화를 주문했다.
10) 빌라하리 카우시칸(Bilahari Kaushikan) 前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이 싱가포르 동남아 연구소(ISEAS)의 세미나에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언젠가는 퇴출시켜야할 것이라고 발언함에 따라 회원국간 분열 논란이 가열되기도 했다(Strangio,
Sebastian. 2020. “Could ASEAN Really Cut Laos and Cambodia Loose?” The Diplomat. October 29,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