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1시간 30분의 장시간 통화를 가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특히, 전쟁의 당사국이자 깊은 이해관계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배제된 채 미-러 담판 성격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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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패권의 종말: 미-러 종전 협상의 전망과 함의 |
2025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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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jungsupkim@sej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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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1시간 30분의 장시간 통화를 가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특히, 전쟁의 당사국이자 깊은 이해관계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배제된 채 미-러 담판 성격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종전 협상의 틀은 기존 서방의 정책 기조와는 크게 다르다. 헤그세스 국방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전쟁 이후 상실된 우크라이나 영토 회복은 비현실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푸틴 대통령이 주장하던 러시아 입장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거기다 3년 동안 함께 싸웠던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과는 일절 상의와 조율도 없이 종전을 밀어붙이고 있는 모양새다. 외견상으로 보면 갑자기 진영 대결 전선이 허물어지고 적과 우방이 뒤바뀌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대러 전쟁을 주도하던 미국이 러시아에 접근하고, 그간 한편으로 싸웠던 서방 동맹국들과는 거친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3주년을 맞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미국은 러시아, 북한, 이란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이 서방 진영에서 이탈해 과거 악의 축으로 비난했던 그룹과 보조를 맞춘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다.
과연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종전 협상은 어떻게 될까? 미국의 지원이 끊겨도 우크라이나는 계속 싸울 것인지, 유럽이 미국 없는 전쟁을 홀로 감당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이어갈 것인지가 우선 관심이다.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 제공 문제다. 유럽 국가들이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병한다는 제언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유럽 국가들 내부에 이견이 조율된 상태는 아니다. 종전 전망보다 더 큰 틀의 질문도 제기되고 있다. 종전이 성사되어 미-러 관계가 개선될 경우 유라시아 지정학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현실주의 이론가들이 지적해 왔듯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속화돼 온 중-러 밀착이 이완되고 미국이 중국 견제에 집중할 수 있는 지정학적 환경이 만들어질 것인가? 나토의 미래도 초미의 관심사다. 미국에 대한 의존 관성에서 깨어나고 있는 유럽이 드디어 진정한 독립을 이룰 만큼 재무장과 자체 결속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집단 방위에 대한 헌신이 생명인 나토는 이 과정에서 어떤 위상을 갖게 될 것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은 비단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찍이 나토와 인도·태평양의 연계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 속에 한국, 일본, 호주 등 AP4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이어왔다. 유럽발 지정학 구도의 변화는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유럽의 대중국 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며, 전쟁 이후 급속하게 가까워진 북-러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울러 서방의 일원으로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대러 제재에 동참해 온 한국의 향후 정책 기조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짚어야 할 질문과 고민해야 할 정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미-러 종전은 익숙했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세기적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기간부터 공언해 오긴 했지만, 미국 대외정책의 대반전이 너무나 극명하게 벌어지고 있다. 주권 국가의 영토적 존엄성이나 자유주의 국제질서 같은 가치와 규범은 이제 먼 구호처럼 되어 버리고 있다. 그린란드 매입, 파나마 운하 통제권 확보, 가자 지구 소유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말들이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세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통적 세력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이며, 그 기반에서 강대국 간 흥정과 타협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다. 1945년 전후 설계가 이루어진 얄타 회담에서 동유럽의 운명을 스탈린에 넘겼던 루스벨트의 결정과도 비견된다.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세력권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해 있는 나라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겪고 있는 당혹스러움이 남의 일이 아닌 상황이다. 이하에서는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전망해 보고, 향후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함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종전이 과연 유럽에 지속 가능한 평화를 가져올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종전 후에 전쟁이 재발할 수도 있고, 당장 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이해관계자인 유럽이 종전안을 쉽게 수용할지도 미지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의 노선 전환에 당혹해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은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유럽 우방국들의 반응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병력 동원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미군의 지원마저 끊긴 상태에서 얼마나 전선을 지탱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유럽이 지원이 계속된다 해도 미군의 도움 없이는 당장 실시간 표적 선정, 지휘통제 지원 등 작전적 측면의 공백도 불가피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쟁 피로도가 심해지면서 국내 정치의 여론 지형도 예전 같지 않다. 1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도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최저 수준인 52%까지 떨어졌고, 대선이 실시된다면 발레리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에 패배할 거라는 조사도 나온 바 있다.
타협을 거부할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거론되는데, 안전보장 조치 없는 종전, 국내 정치적 분열, 대규모 국외 탈출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강대국의 무도한 침공으로 영토의 20%를 상실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지만, 전투를 고집하다가는 80% 영토마저 보전하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물리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인적자원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다. 유럽으로 떠난 430만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약 3분의 1이 18세 미만의 젊은 층이다. 전쟁에서 수십만 명이 죽고 다친 데다 이런 막대한 생산인구의 유출은 향후 우크라이나가 정상 국가로서 재건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두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로서는 일정 정도의 타협이 불가피한데, 종전 수용의 마지노선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서방과의 연계 설정, 자금과 물자의 지속 지원, 과격한 비군사화 방지, 그리고 유럽의 파병과 같은 전쟁 억제 조치 등을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더불어 유럽의 선택이 중요하다. 유럽은 미-러 협상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간절히 바라는 안전보장 조치에 대해 어떤 실질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 입장에 가까워 보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종전 구상에 대해 유럽의 반응은 강경 입장이 다수인 가운데 일부 현실론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먼저 강경론은 절대 푸틴에 침략의 과실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주권 국가의 영토적 존엄성을 침범했다는 당위론적 측면뿐 아니라 러시아의 승리가 몰고 올 국제정치적 함의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끝나지 않고 유럽의 국경과 안보에 심각한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성공한 푸틴의 러시아가 조지아나 몰도바, 또는 발트 3국을 건드리며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물러나는 유럽에서 러시아의 회색지대 도발은 유럽 내부의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쳐 유럽에서 러시아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든다는 두려움도 깔려 있다. 기본적으로 억제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강경론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당시 서방의 유약한 반응, 그리고 2022년 러시아 침공 이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미국과 유럽의 정책이 잘못이었다고 비판한다. 결의를 보여야 할 때 그러지 못함으로써 더 큰 비용과 위험으로 러시아 위협에 맞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론자들은 강경론이 출구전략 없는 승리론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형적 소모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소모전에서 중요한 건 병력과 무기가 많은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방이 아무리 자금과 물자를 지원해도 러시아가 이 점에선 분명히 유리하다. 특히 병력 동원이 가장 큰 문제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기 위해선 나토의 직접 개입 외에는 방법이 없지만, 이는 러시아의 핵 억제력 때문에 불가능하다. 제3차 세계대전과 핵전쟁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결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조건이 처음부터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무모한 희생을 계속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타협론자들의 생각이다.
전쟁 지속과 타협을 떠나 현실적으로 거론되는 쟁점 중 하나는 종전 이후 유럽 파병론이다.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기 위해 유럽 국가가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파병하자는 제안을 말한다. 현재로서는 이에 대해서도 유럽의 입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는 평화유지군 성격의 파병을 검토할 의지를 밝혔으나, 독일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파병 논의가 시기상조라는 신중론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지원에 가장 앞장서 왔던 폴란드는 파병 가능성에 단호히 선을 긋고 있다. 미군의 참여 없는 유럽의 파병 논의가 나토의 결속력을 더욱 약화시키고, 미-폴란드 안보의 탈동조화를 부추길 가능성을 염려하는 게 반대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과연 유럽의 어느 나라들이, 어느 정도 규모의 병력을, 어떤 임무하에, 그리고 어떤 깃발 하에 파병하게 될 것인가? 최소한으로는 소규모의 병력이 휴전 감시 임무를 맡는 평화유지군 성격의 파병이다. 최대치로는 수만 명의 병력이 러시아의 재침공을 억제하는, 즉 인계철선의 역할을 하는 경우다. 우크라이나는 당연히 후자를 희망한다.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할 경우 러시아가 감수해야 할 비용을 강조해 전쟁의 문턱을 높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의 입장에선 억제가 깨졌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감수할 것인가? 따라서 유럽 파병론의 구체적 모습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 필요성과 러시아와의 전쟁 연루라는 위험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
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재 논의되고 있는 흐름대로 정리된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즉, 우크라이나가 영토의 20%를 상실하고, 애초에 기도했던 나토 가입도 배제된 채 종전을 맞는다면 전체적인 전쟁 결산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선 우크라이나가 최대의 피해자라는 점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공업지대가 집중된 영토의 5분의 1을 잃게 될 뿐 아니라 국토의 파괴와 막대한 인적 손실도 크나큰 피해다. 특히, 5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에 더해 500만 명이 넘는 인적자원이 해외로 떠났는데, 전쟁 이후에도 국내 복귀가 확실치 않아 국가적 재건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마저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압박해 온 광물 협정도 진통 끝에 큰 틀의 합의에 도달했다. 초기 젤렌스키 대통령은 “5천억 달러를 갚으려면 250년이 걸릴 것”이라며 “10세대가 갚아야 할 빚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관여를 유인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기 미측이 제안한 안에 비해서는 덜 가혹하지만, 우크라이나로서는 여전히 안전보장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전략광물, 석유·가스, 그리고 인프라 자산에 대한 미국의 개발 지분을 인정한 셈이다. 러시아에 의해 파괴되고 미국에 의해 자원이 착취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러시아와 경제협력 모델이 파탄 난 데다가 재무장의 과제를 안게 된 유럽도 안보와 경제의 이중 부담에 짓눌리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유럽은 에너지 수요의 4분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으나, 이제는 에너지 가격 상승과 산업경쟁력 차질이라는 큰 비용을 치르고 있다. 특히 러시아와 경제적 협력 관계가 깊었던 독일의 피해가 크다. 무엇보다 미국이 떠난 유라시아 안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가 유럽의 긴급한 숙제로 떠올랐다. 대서양 동맹이 해체되거나 미국이 탈퇴한 것은 아니며, 아직도 유럽엔 1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조약 문구가 아니라 집단 방위에 대한 헌신이다. 나토의 정신은 ‘회원국 일방에 대한 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 방위 제5조 공약으로 대표된다. 그런데 바로 이 핵심적 약속에 대해 희의가 확산되고 있으며, 유럽 내에서는 독자 방위력 확보에 대한 제언이 분출하고 있다. 주요 EU 국가들은 조속히 국방비를 GDP의 3%까지 늘려야 하고 수년 내에 5%까지 확대해야 하며, 이를 위해 유럽 재무장 은행(European rearmament bank)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중 하나다. 또한 유럽의 무기 획득을 중앙집권화하여 개별 국가가 개발 또는 구매하기에 어려운 방공시스템, 전략적 공수 능력, 지휘통제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그동안 유럽이 미국에 의존해 왔던 군사 역량들이다. 핵무기 증산도 주장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핵탄두 생산을 늘려야 하며, 특히 최전선 국가들의 억제에 도움이 되도록 저위력 핵무기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한마디로 유럽방위의 유럽화, 미국으로부터의 전략적 독립을 의미한다.
러시아 역시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을 맞는 경우에도 전략적 손실이 만만치 않다. 먼저 반러시아 정서(Russo-phobia) 강화로 유럽과 화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정학적 환경이 악화된 것은 러시아에 막대한 손실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으로 발트 함대가 포위된 것도 안보적으로는 큰 부담이다. 유럽과 단절된 채 유라시아 중·동향 방면밖에 활로가 없다는 점도 러시아로서는 아픈 부분이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차단시키고 우크라이나 동남부 일대를 장악한 것은 러시아가 전쟁 명분으로 삼았던 최소한의 완충지대 확보에는 성공했음을 뜻한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이 복원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도 적지 않는 전략적 이득이다. 미국이 러시아의 세력권을 존중해 주는 것은 물론 향후 미-중-러 삼각 강대국 정치를 펼쳐 나간다면 다극화된 국제질서에서 러시아가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염원이 이루어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전쟁 초기 나토의 결속, 유럽과 인도-태평양의 연계 등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전략적 기회를 잘 활용한 측면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구도로 국제질서를 규정지으면서, 러시아 힘 빼기와 중국 봉쇄라는 이중 과제를 적절히 추구했던 것이다. 내심 껄끄럽게 여겨왔던 독일과 러시아 간의 에너지·산업 협력이 파탄 난 것도 미국으로서는 내심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비록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미국의 정책이 급변했지만,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비해선 전략적 손실과 피해가 크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막대한 전비 투입과 경제적 지원이 있었으나, 트럼프 행정부 들어 우크라이나 광물 지분을 반강제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미-러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될 경우 미국이 러시아를 대중 견제에 동참시키는 지정학적 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는지가 관심이다. 닉슨 행정부 시절 미-중 화해를 통해 소련과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키신저 전략의 재현 가능성 문제를 말한다. 현실주의 이론가들은 중-러 연대를 약화시키는 것이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입을 모아 왔다. 그러나 미-러 관계 복원이 냉전 시대 미-중 데탕트가 초래한 것과 같은 정도의 변화는 초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러 관계엔 전통적 불신과 한계가 남아 있지만, 현재 양국을 묶어주는 미국 견제라는 전략적 목표만큼은 확고하다. 무엇보다 중-러 간의 긴장이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 닉슨의 미-중 화해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소 갈등이 거의 전쟁으로 비화될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도 2월 24일 정상 통화를 통해 중-러 관계는 대외적 영향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대러정책이 반전을 이룰 경우 중-러 밀착을 가속화했던 동력은 사라지고, 미-중-러 간 강대국 정치가 본격 가동되는 토대는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변심에 유럽은 재무장으로 대응하는 분위기지만,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안보 아키텍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제언도 존재한다. 현실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떤 면에서는 냉전 종식 후에 러시아를 포함한 지속 가능한 유라시아 안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유라시아 질서에서 러시아의 적절한 위치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유럽은 경악했고, 우크라이나 다음의 위협도 걱정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양보는 미봉책일 뿐 이는 앞으로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는 게 서방 주류의 시각이다. 히틀러에 속았던 체임벌린의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들은 러시아에 대한 과소평가도 금물이지만 과대평가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주류 진영의 걱정처럼 푸틴과 그의 지정 전략가들은 제국의 부활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꿈꾸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러시아의 역량이다.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 영토의 20%를 간신히 확보한 러시아가 자신의 안보적 완충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 지정학적 세력권을 확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군비 경쟁을 이어갈 경우 안보딜레마만 깊어 갈 것이며, 특히 양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들은 암울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보다는 유럽과 러시아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정학적 타협을 이뤄냄으로써 어떻게든 안정적인 현상 유지 구조를 만들어내자는 주장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 역시 양 진영의 경쟁과 충돌 지점이 아닌 교량과 완충의 지대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이는 우크라이나 종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온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 외교의 종말을 상징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침공 등이 주변부에 자유를 확산하려는 노력이었다면, 나토 동진은 유라시아 심장부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와 가치를 확장하려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주변과 중심부 모두에서 미국 스스로 실패를 자인하고,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떠받드는 역할을 포기한다는 점을 공언하고 있다. 국제질서는 이제 전통적인 세력균형 정치로 환원되는 모습이다. 미국은 그동안 국제 무정부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패권국의 역할을 자임해 왔다. 세계가 미국의 초월적 지위와 예외적 역할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초대된 제국’, ‘자비로운 패권’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패권적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의 좁은 국익을 거칠게 추구하는 일반 강대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제질서는 강대국들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국익을 거침없이 추구하며 타협과 거래가 병행되는 세력균형 질서로 바뀔 수밖에 없다.
세력균형 질서 혹은 다극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대국 간 세력권의 획정 문제다. 세력권에 대한 열강 간의 합의와 존중이 국제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는 최소한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푸틴 간에 이루어지는 종전 협상도 러시아의 세력권에 대한 열강 간의 재합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극 질서와 일극 질서 중 어느 것이 더 안정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분명한 건 강대국 세력권의 직접적 자장 안에 있는 국가들은 피곤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도 그렇지만, 트럼프가 문제 삼은 그린란드, 파나마, 멕시코, 캐나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라시아에서 러시아의 지분을 인정하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이 미국의 세력권임을 거침없이 주장하고 있다. ‘먼로주의의 확장적 부활’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미-러 종전 협상이 시작되자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있었던 얄타 회담의 기억도 소환되고 있다. 강대국 간 세력권 구축 과정에서 약소국은 거래와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소련, 영국의 지도자들은 각자의 세력권 구축을 통해 전후 유럽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더러운’ 타협을 한 바 있다. 얄타가 불명예스러운 것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배타적인 세력권을 요구하는 스탈린에게 양보하여 동유럽을 소련에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유럽의 절반이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반세기 동안 동유럽은 공산주의 독재에 신음하는 결과가 초래된 바 있는데, 안정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강대국 외교가 얄타에 이어 사우디의 리야드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지난 70년간 한국은 미국적 질서와 패권 속에서 안전보장을 담보하고 번영을 구가해 왔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부상의 수혜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대전환기를 맞아 한국 외교도 기본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을 맞고 있다. 신 국제질서에서는 강대국 세력권 분할 속에서 전략경쟁이 가열될 것이며, 각자도생과 합종연횡의 모습이 노정될 것이다. 유럽의 독자 방위 역량 강화, 미-중-러 경쟁과 연대의 병행, 글로벌 사우스의 줄타기 외교 등이 그런 모습들이다.
당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북-러 관계에 대한 영향이다. 포탄 제공, 북한군 파병 등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높였고, 이런 배경하에서 북-러 밀착이 이루어진 바 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된다면 북-러 관계가 다시 소원해 질 가능성도 제기되나, 북-러 간 전략적 협력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단순한 군사 원조를 넘어 북-러 간에는 노동력과 에너지의 교환 등 여타 협력 유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가 북한의 손을 잡은 것은 단순히 포탄에 대한 갈구뿐 아니라 지정학적 방향을 동쪽으로 선회한 전략적 조정과도 연관이 있다. 유럽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러시아는 유라시아 동단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이런 측면에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미-러 관계가 개선될 경우 북-러동맹 복원으로 부각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진영적 대결 구도는 다소 이완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은 한-러 관계 개선, 남북 관계 관리 등에 있어 일정 정도 한국에 운신의 폭을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한-러 관계를 관리, 복원할 경우 러시아의 대북 군사 지원을 견제할 수 있는 한국의 발언권이 생긴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외전략은 한미동맹과 친서방 외교를 여전히 기본 축으로 삼되, 강대국 정치의 연루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강 노력과 함께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력균형 질서가 도래하면 한국과 같이 지정학적 단층선에 있는 국가들은 특히 유의해야 한다. 세력권이 겹치고 아직 명확하게 경계 설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대에 놓인 국가들은 강대국 경쟁 또는 그들만의 타협에 의해 국가적 운명이 영향받는 사태가 초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영 외교에 갇히지 말고 중국, 러시아와도 최대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트럼프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 유럽, 호주, 글로벌 사우스 등과의 다층적인 연대도 필요하다. 물론 중국의 부상에도 지정학적 대응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변화가 한국에 직접적 위협을 주는 건 아니지만, 지정학적 도전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미일 안보협력의 효용성을 백안시하지 않되, 느슨한 밸런싱 차원에서 3국 협력의 수준과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북한 문제는 핵 개발을 시도하는 불량국가, 고립된 깡패 국가 성격에서 벗어나 이제는 강대국 지정학 게임의 일부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통일과 비핵화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지만, 당면 정책목표가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남북 관계는 당분간 현상의 안정적 유지, 즉 소극적 평화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한반도 안정에 우선 역점을 두면서 대화와 관계 개선의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통일과 비핵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판도가 크게 흔들려야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긴 호흡으로 사고해야 한다. 당분간은 변화된 국제질서의 흐름을 면밀히 관찰하며, 자강의 노력을 바탕으로 기민하고 융통성 있는 대응이 요구되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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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협상의 전망: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딜레마
| 전쟁의 결산
| 유라시아 안보의 미래와 국제질서의 대전환
| 한반도 외교⸱인보에의 함의
※ 「세종포커스』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세종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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