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포커스] 통일과 자주를 포기한 북한의 미래

등록일 2024-09-02 조회수 2,685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작년 말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올해 최고인민회의, 국방성 연설에서 한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쓰나미를 몰고 올지 예상했는지 모르지만 김정은의 선언은
통일과 자주를 포기한 북한의 미래
2024년 9월 2일

 

    전성훈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 dr.cheon@kinu.or.kr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작년 말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올해 최고인민회의, 국방성 연설에서 한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쓰나미를 몰고 올지 예상했는지 모르지만 김정은의 선언은 한민족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핵을 가진 소련이 붕괴한 사실을 잘 아는 김정은은 핵무기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지만, 내부의 동요와 이탈로 인한 정권붕괴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북한 내부를 흔들 수 있는 체제대결 세력인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해서라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이번 결정의 배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재체제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 독재를 끝장내는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통일을 포기한 북한
      김정은은 통일 포기 선언의 후속 조치로 조평통, 민경협 등 관계기관과 6·15 공동선언 북측위원회, 민화협 같은 남북교류단체를 정리하고 남북경협에 관한 각종 법률을 폐기했다. 아울러 북한 전역에서 통일 지우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북한의 국가에서 ‘삼천리’란 단어를 뺏고, 평양 지하철의 개선역과 승리역 사이에 있는 통일역에서 통일을 지웠으며 자녀 이름에 통일을 쓰지 못하게 했다. 통일 의지를 대내외에 웅변해 온 대표적인 상징물로 평양 입구에 세운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도 파괴했다.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부정하고 광화문의 충무공 동상을 철거한다면 국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과 저항이 불 보듯 뻔하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을 폭파하고 노예해방 역사를 지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제2차 남북전쟁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사상적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는 엄청난 저항을 불러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현재 북한 정권이 벌이고 있는 통일 지우기 작업 역시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빗겨갈 수 없으며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는 민족해방전쟁, 통일을 완수하겠다는 조국통일전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분단 이후 지난 80년 동안 북한 정권은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완수하는 그날까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며 주민을 세뇌했다. 외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 온 대다수의 선량한 북한 주민은 3대 세습정권의 거짓말과 선동에 희생을 강요당하는지도 모른 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김정은의 통일 포기 선언은 그동안 북한 동포의 눈과 귀를 가리고 북한 사회를 하나로 결집했던 통일과 민족해방이라는 사상적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북한 체제에 정치적 균열을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 80년간 통일을 일생의 목표로 교육받고 살아온 북한 주민이 느낄 의구심과 심리적 충격 그리고 상실감이 클 것이다. 과연 김정은이 김일성의 유훈이자 교시인 통일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한지, 김정은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부터 제기할 것이다. 아무리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했다고 자화자찬하더라도 북한 주민들의 눈에 그가 김일성을 대체할 정도의 위인이라고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북한 주민들의 의구심과 충격은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서 김정은에 대한 반발과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앞으로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한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최근 일본 조총련 회원들이 조국통일을 염원해서 북한을 지지했는데 왜 당국이 통일을 지우려고 하느냐면서 총련 본부에 항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폐쇄체제의 특성상 일반 주민이 통일 지우기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북한 사회는 “김정은을 옹호하는 반통일세력 對 김정은에 반대하며 통일을 원하는 친통일세력”으로 양분되고, 통일문제를 둘러싼 ‘北北’(북북) 갈등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 내부의 이러한 갈등은 독재정권에 반대하며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체제저항세력이 주민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 그리고 활동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 자주를 포기한 북한
      자주는 통일과 함께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사상적 지주다. 3대 세습정권이 내세운 대표적인 대내외 정책에 자주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김일성 시기에 남북한이 합의한 7·4 공동성명의 3대 원칙 가운데 하나가 자주이고, 그가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조건과 원칙 및 시정방침을 담고 있다. 김정일 정권은 ‘강성대국론’에서 정치·군사·경제 강국 실현을 주장하며 자주를 강조했고,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제시하며 민족자주의 원칙을 핵심으로 삼았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도 자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개개인이 당의 영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결속할 것을 주문했다.

      김정은 역시 자주는 대내외 통치의 핵심 이념이다. 그가 2016년 신년사에서 제기한 ‘자강력 제일주의’는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는 정신, 즉 자주의 정신을 담고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이 대외전략을 수정하며 내건 ‘자력갱생’ 역시 자주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다.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은 미국에 대한 경계감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에게는 최단기간 내에 나라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계 선진수준에로 도약할 수 있는 자립적 발전능력과 기반이 있습니다. 수십년 간 다져온 자립경제토대와 능력 있는 과학기술 역량, 자력갱생을 체질화하고 애국의 열의로 피끓는 영웅적 인민의 창조적 힘은 우리의 귀중한 전략자원입니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튼튼히 틀어쥐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해 나갈 때 우리는 남들이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힘으로 놀라운 발전 상승의 길을 내달리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은 2019년 12월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세기를 이어온 조·미 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되어 명백한 대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서 제재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자력갱생을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당대회를 결론지으며 “우리 혁명 앞에 나선 중대한 역사적 과제는 전당이 이민위천, 일심단결, 자력갱생을 다시 깊이 새기고 더 높이 들고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자력갱생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처럼 3대에 걸쳐 자주를 생명처럼 여기는 태도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지난 6월 19일 북한이 러시아와 체결한 “포괄적 전략적인 동반자관계조약”(신조약) 제3조가 북한이 자주를 포기한 것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조항은 1961년 7월 6일 체결된 “조·소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에는 없는 새로운 조항이다: “쌍방은 공고한 지역적 및 국제적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호상 협력한다. 쌍방중 어느 일방에 대한 무력침략행위가 감행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이 조성되는 경우 쌍방은 어느 일방의 요구에 따라 서로의 립장을 조율하며 조성된 위협을 제거하는데 협조를 호상 제공하기 위한 가능한 실천적 조치들을 합의할 목적으로 쌍무협상 통로를 지체없이 가동시킨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한·미 연합훈련을 위협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와 합동훈련을 하기 위한 근거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미가 대규모 훈련을 하더라도 북침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북한과 러시아가 잘 안다. 분단 이후 한국의 국방전략은 ‘억지와 응징보복’ 원칙을 지켜왔다.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되 억지가 실패하는 경우 응징한다는 원칙으로서, 선제 침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한 순수 방어 전략이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6월 20일 베트남 순방을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에서 북·러 신조약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약상 군사적 원조는 오직 침공, 군사적 공격이 있을 때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내가 알기론 한국은 북한을 침공할 계획이 없으므로 우리의 이런 분야의 협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실제 전쟁이 일어날 경우의 군사지원은 제4조에 규정되어 있고, 제3조를 군사훈련 대응용으로 보는 데도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제3조는 외부의 침략을 초래할 수 있는 북한 내부의 위협, 즉 외부에서 북한을 침공할 수 있는 대내환경이 조성되는 경우 지원하는 규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 내부에서 발생하는 정권에 대한 위협이 적대세력의 외침을 불러올 만큼 큰 경우에, 예를 들어, 대규모 민중봉기, 군사 쿠데타, 무장폭동 등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 러시아의 힘을 빌리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정권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하는 경우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제3조가 위의 해석대로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조항이라면 이는 북한체제의 핵심 가치인 자주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남북분단 상황을 민족의 자주를 지키는 북한과 외세에 굴종하는 남한의 대결로 규정하고 세습정권의 정통성을 선전했다. 자주는 외세의 침탈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이뤄야 한다며 북한 동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정신적 도구였고, 남한을 미제의 꼭두각시로 비판하며 한국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외세배격 운동을 부추기는 선전선동 무기였다. 김정은 정권이 내부의 소요를 제압하기 위해 외세의 개입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북한 주민에게 알려지게 되면 통일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못지않은 불만이 북한 사회에 퍼질 것이다.
    | 북북갈등의 부상과 남남갈등의 퇴조
      북한의 적대적인 두 국가 선언과 북·러 신조약은 해방 이후 북한 체제를 지탱해 온 사상적 양대 기둥인 통일과 자주를 허무는 상황을 만들었다. 자주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신념은 통일에 대한 것만큼이나 강하다. 시간이 갈수록 자주와 통일의 신념을 박탈당했다고 자각하는 주민들이 늘어날 것이며 체제의 정신적 기반이 무너진 북한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80년간 창공을 나르던 북한이라는 새가 통일과 자주라는 두 날개를 잃어버린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김정은의 결단으로 만들어진 이 상황은 북한 내의 사상과 이념 투쟁, 즉 ‘北北’(북북) 갈등으로 발전할 것이다.

      북북갈등이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촉매가 될지 아니면 영구분단이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힘을 모아 차분하고 신중하게 대처한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안정되고 평화로운 통일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좌우 극단의 이념대결과 국론분열이 지속된다면 우리 땅에서 핵무기가 터지는 군사충돌이나 김정은의 바람대로 영구분단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 북북갈등이 부상하는 반면에 남한에서는 남남갈등이 퇴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괴롭혀 온 소위, ‘남북관계의 이중성’ 문제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가 대북통일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즉 북한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대치한 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더불어 살면서 통일을 이뤄야 할 동포라는 이중성의 딜레마가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론분열, 즉 남남갈등을 초래했다.

      이제 북한에서 북북갈등이 조성될 것으로 예견되는 만큼,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도 그 대상을 소수의 반통일세력과 통일을 열망하는 대다수 친통일세력으로 구분해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정권 중심의 반통일세력은 국제제재의 틀로 규제하되, 친통일세력은 북한 변화의 구심체가 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북정책의 목표와 방향을 둘러싼 과거의 혼선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통일의 길은 남과 북의 친통일세력이 함께 연대하고 민족자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자유와 번영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김정은의 ‘두 국가론’에 동조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과거 일부 학자의 ‘중립화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냉담했던 우리 국민이 ‘두 국가론’을 수용할 리는 만무하다. 소수의 시대착오적인 오판으로 남남갈등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란다. 남과 북의 그 누구도 단일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의 열망을 부정할 수 없다. 북한이 통일을 거부할수록 우리는 국민의 통일 열망을 고취하고 국제사회에서 활발한 통일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한반도 통일의 주인공이자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주체이며 통일된 한민족 국가의 ‘적자’(嫡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세종연구소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