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다자외교안보 과제: 강대국 정치와 다자외교
이신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swlee@korea.ac.kr
다자주의(multilateralism)는 세 개 이상의 국가가 대화와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자국의 이익과 국제협력의 균형을 모색하고자 국가 정책을 조정하는 관행이자 상호의존의 질서를 정립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따라서 다자주의에 기반한 다자외교는 단기적으로 국익에 손해가 있더라도 중장기적인 이익과 공영(共榮)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유엔과 같은 다자주의 제도는 회원국 간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원칙으로 소수의 강대국이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지양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약소국과 중견국들은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힘의 정치가 다자주의 원칙을 훼손한다고 비난하고, 강대국들은 중소국들의 무임승차에 불만이 많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가는 여전히 다자주의를 자국 이익달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강대국들은 자국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하여, 중소국들은 자국 홀로 글로벌 이슈에 관여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관여 자체가 대부분 불가능해서이다.
강대국 정치와 다자주의 경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유엔, 세계보건기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의 창설을 통해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LIO)를 구축하고, 다자간 협력외교를 지향하였다. 존 아이켄베리 교수는 미국을 20세기 다자주의의 가장 위대한 옹호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다자외교가 진정한 다자주의를 지향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미국의 반대로 연임에 실패한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지구촌 최대의 다자기구인 유엔이 ‘무소불위의 골리앗’처럼 전횡을 일삼는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 테러와의 전쟁, 세계금융위기, ‘세계 경찰관 역할’에 대한 미국민들의 피로감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득세와 같은 상황은 반미주의 확산, 미국의 상대적 힘의 쇠락, 자유민주주의 국가 내부에서의 불협화음 조성 및 LIO의 위기론으로 이어졌다. 반면,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다자무대에서 미국(특히 트럼프 시기)의 ‘빈틈’을 파고들며 제3세계 국가나 다자기구들에 대한 대규모 인적, 물적 기여를 통해 국제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무역분쟁으로 본격화된 미·중 패권경쟁은 정치, 군사, 문화, 기술뿐 아니라 체제이념경쟁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자유주의·민주주의 vs. 비자유주의·권위주의 대립이 뚜렷해졌다. 특히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로 과학기술이 안보와 연계되는 것이 미·중 갈등의 핵심현안이 되면서 양국은 선발 기술 선점을 위해 이미 총칼 없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더해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공급망 문제로 중국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와해위기 속 세계화의 분절현상이 나타났고, 세계 경제가 미·중 양대진영으로 디커플링(탈동조화) 하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핵 보유 강대국 간 ‘공포의 균형’ 문제, 군비경쟁 심화와 같은 안보문제가 경제 논리를 (재)압도하는 지정학의 회귀나 신냉전 구도의 신호탄이 되었다. 아프간 철군과 크림반도 합병사태에서 미국이 보인 소극적인 대외관여와 ‘트럼프 현상’으로 대변되는 힘의 공백 속에 중국과 러시아의 강대국 정치와 지정학적 도전이 LIO를 위협하게 되었다는 방증이란 지적도 있다. 더욱이, 침공에 대한 응징으로 미국과 유럽연합 및 동맹국들이 가한 전대미문의 경제제재로 러시아는 세계 경제와 단절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전쟁’으로 인해 이미 휘청거리던 세계화가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결국, 냉전 종식이 경제적 상호의존과 세계화를 불러왔으나,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 정치갈등이 세계 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세계화의 퇴조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강대국들이 내세우고 있는 다자주의는 상대편의 우방국을 빼앗거나 내 편 아니면 배제하는 진영싸움이 되어 금융, 에너지, 기술혁신과 표준에서 편 가르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기술우위를 점한 우방국들과의 첨단기술 영역에서의 ‘보호주의 진영화’를 촉진하고자 ‘신뢰가치사슬(TVC)’ 구축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일환으로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 일본, 대만에 ‘칩4(Chip 4) 동맹 결성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국이 전통적으로 지향해온 법적 구속력을 갖는 다자주의의 중요성과 국제기구에서의 리더십을 여전히 강조하나, 대규모 다자주의 네트워크보다는 소다자주의(minilateralism)와 민주동맹국 간 결속강화를 통해 LIO를 재건하고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 위한 기술동맹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D-10(민주주의 10개국), T-12(첨단기술과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국가연합), 칩4와 같이 사안별 맞춤형 연대를 선호하고 있다. 중국과의 대립이 첨예한 인도·태평양(인태) 지역에서는 QUAD(미·일·인·호 4자 안보협력), AUKUS(미·영·호 3자 안보파트너십), Five Eyes(미·영·캐·호·뉴 5자 군사동맹 및 정보네트워크)와 같은 소다자주의에 기반한 다양한 소규모 다자그룹 결성과 확대에 더욱 적극적이다.
소다자주의란 한정된 기간 내에 구체적 이슈 해결을 위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소수의 국가가 공식적인 다자협력체보다는 유연한 협력 메커니즘을 만들어 집단으로 협의하고 행동을 취함으로써 구체적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일종의 전략적 파트너십이다. 이는 NATO와 유사한 기능을 하되, 유연성이 적은 공식 다자기구 대신 여러 소다자기구들을 연결하여 구축한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는 데 활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네트워크는 자칫 양 강대국의 지정학적 경합이 충돌하는 플랫폼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중국은 이와 같은 미국의 소다자주의적 접근을 ‘선택적 다자주의’라고 비판하며 소그룹을 지양하고 유엔, WTO, G20 등 기존 다자간 틀을 강조하고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진핑 주석은 개방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많은 국가와 ‘인류 공동운명공동체’를 구축하는 포괄적인 다자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유엔을 비롯한 다자기구들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북·중·러 관계강화를 통해 반미 연대를 모색하는 한편, 북한, 이란, 시리아 등을 포함한 16개국과 ‘다자주의를 명시한 유엔헌장 수호그룹’ 결성을 도모하여 미국의 제재에 맞설 ‘반(反) 제재 국가 모임’을 추진 중이다.
돌이켜보면, 2010년대 들어 미·중 간 지역 주도권을 두고 경쟁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국은 다자주의 지역협력 메커니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세안 회원국과 한·중·일로 구성된 ASEAN+3,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4개국과의 안보협력을 위한 상하이 협력기구(SCO)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주도권을 행사해 왔다. 또한, 2013년 시 주석이 주창한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해로와 육로로 연결하여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추진된 것이다. 중국의 전략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동아시아 중심을 넘어 더 포괄적인 인태전략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QUAD가 출범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은 미국의 선별적 소다자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협력을 통한 국제분쟁 해결을 강조하였으나, 남·동중국해 관련 포식자적인 행태, 무역보복, 코로나19 관련 국제사회의 대중 불신 등으로 인해 중국식 다자주의 이니셔티브의 진정성에 대한 국제적 의구심이 확대되었다.
다자주의를 앞세운 미·중 진영화 대립이 첨예화될수록 인태 지역국가들의 딜레마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어느 한 편을 택할 경우, 다른 한 편의 보복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낀’ 국가들이 자율적 공간을 확보하긴 쉽지 않다. 설사 비슷한 처지나 입장의 국가들이 다자협력체를 이루고 있다 해도 강대국의 압력이나 회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상 ‘이탈자’ 없이 굳건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중 간 선택의 압박이 커지면서 안미경중(安美經中)과 같은 줄타기외교도 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새 정부의 다자외교안보를 위한 제언
첫째, 외교는 무엇보다 대전략(grand strategy)이 필요하며, 새 정부의 다자외교안보전략도 이 대전략과 직접 연계되어 구축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어떤 정권이나 지도자와 관계없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대전략이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견고함이 우리의 국익이며 외교안보 대전략의 핵심임을 인식하고, 영국, 호주 및 일본처럼 미국에 신뢰를 주는 핵심동맹 파트너로서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규범 및 이익을 공유하는 친구국가들과의 다자주의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선택일 뿐 아니라 생존전략이다.
둘째, 다자외교는 양자외교의 부속물이나 보완제가 아니라 동일한 중요성을 지녀야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국가의 경우 다자협력체제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전방위적으로 치열해진 미·중 전략경쟁시대 가치동맹과 이익동맹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단기적 현안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positioning)’할 것인가라는 딜레마는 비단 한국만 직면한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차원에서 미·중 사이에 ‘낀 중견국 다자연대’를 강화함으로써 강대국에 대한 일정 정도의 전략적 레버리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동지(like-minded) 국가군을 형성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같은 상황에 부닥친(like-situated) 국가군을 결성하고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미·중 기술패권경쟁의 치열한 가운데 민주주의 기술(다자)동맹에 ‘안착’하여 지정학과 지경학과 연계된 ‘기정학(technopolitics)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안보, 경제, 기술이 하나로 연계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QUAD 및 파이브 아이즈 확대 과정에 동참할 기회를 잡고, 미국 주도의 기술생태계 재편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디지털, 공급망, 청정에너지와 같은 신통상 의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최근 미국이 제안한 역내 포괄적 경제협력체인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결정을 편승외교라고 비판하고 쿼드나 경제번영 네트워크의 작동이 불확실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위기는 동맹의 가치를 일깨운 자명종이었고, 미국 중심의 가치동맹이 결집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디지털 강점 극대화를 통한 민주주의 기술동맹연대 참여와 주도방안을 다각도로 구상해야 한다.
넷째, 역내 국가들과 사안별 협력, 혹은 틈새 영역발굴을 통해 소다자안보 협력체들을 주도적으로 추동해야 한다. 또한, 기존의 동북아 지역군을 넘어 동남아, 인도, 유럽 등과의 연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낀 국가의 전략공간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중추국가를 기치로 삼은 새 정부가 강대국에 대한 의존도를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신설될 ‘신흥안보위원회’(ESC)를 중심으로 비전통안보 영역에서 강대국 주도 글로벌거버넌스로는 이루기 힘든 새로운 ‘중견국 다자안보협력 이니셔티브’를 구상해 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K-이니셔티브’가 지속성과 연계성을 갖기 위해 역대 정부들의 지역협력 이니셔티브들을 건설적 비판을 통해 받아들이는 ‘축적의 외교’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미·중 균형외교보다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고, 민주, 법치, 규범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다자주의 연대를 통해 대중 경제의존도를 줄여가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지난 5년 ‘북(北) 바라기’로 국제무대에서 이탈했던 궤도를 제대로 잡기 위해 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정철학과 정책기조가 ‘문재인 뒤엎기’(Anything but Moon) 혹은 ‘미국 바라기’라는 반발에 직면하여 그 의도가 왜곡되고 추진력을 잃지 않도록 외교의 탈(脫)정치화 노력과 더불어 국민공감대 확대를 위한 국민외교 추진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