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4 논의와 우리의 대응
연원호(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
yeonwonho@gmail.com
최근 미국은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정책과 대중국 반도체 분야 견제 정책을 동시에 실행에 옮기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반도체 관련 정책을 이해하는 데 이러한 두 정책이 동시에 시행되고 있음과 함께 두 정책이 추구하는 정책적 목표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이 제안하고 국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한‧미‧일‧대만의 반도체 협의체 팹4(FAB4)는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대중국 첨단반도체 분야 견제를 위해서는 아직까지 독자적인 수출통제와 외국인투자심사 강화 등 국내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FAB4 논의 배경
작년 가을 미국은 한국, 미국, 일본, 대만 4자간 반도체 공급망 회복력 워킹그룹 신설을 제안했다. 이것이 FAB4 논의의 시작이다. “팹(FAB)”이란 제조공장인 패브리케이션 플랜트(Fabrication Plant)를 의미한다. 즉, 미국이 제안한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주요 반도체 제조국 간에 반도체 안정적 공급을 위해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협력체 구축이 목적임을 알 수 있다. 2020년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중을 보면 한국 21%, 미국 12%, 일본 15%, 대만 22%로 FAB4 국가가 80%를 차지하고 있다. FAB4는 구속력있는 협정이나 동맹과 같은 국가 간 조약이 아니다. FAB4는 미국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위해 △공급망 협력 △인력양성 협력 △상호간 투자 인센티브 협력 △R&D 협력 등을 한국·일본·대만과 함께 논의하고자 제안한 실무급 협의체다.
FAB4의 참여국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중요성과 유사성에 비춰봤을 때 “반도체 분야의 APEC”이라고 부를만하다. 대만이 경제체(economic entity)로 참가한다는 점과 배타적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자유로운 국제교역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 유사하다. 최근 각국은 반도체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나섰다. 대부분 상당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 정책을 기반으로 한 산업정책이다. 미국은 이런 주요 강자들의 정책이 극단적인 자국우선주의나 보호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FAB4를 제안했다.
미국은 미국-한국, 미국-일본, 미국-대만 간 반도체 관련 양자 대화체를 운용하고 있지만, 양자 논의를 통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결에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미국 상무부가 전세계 반도체 생산업체들에 공급망 정보를 요구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FAB4 반중동맹인가
미국, 일본, 대만에서는 FAB4 관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가운데 우리 언론이 미중 대결구도 프레임 속에서 FAB4를 극단적 반중동맹체로 언급하면서 우리정부에 부담을 줬다. 5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며 우리 언론에서는 중국의 경제보복 우려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러나 우선 사전적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 배제와 견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원래 FAB4를 제안한 미국은 중국 견제 내용을 FAB4에서 직접적으로 다룰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견제나 제재 내용은 없더라도 중국을 논의체에서 배제할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FAB4에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이 동북아지역 국가들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에 따른 우려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FAB4에서 절대로 특정 국가를 견제한다는 취지의 논의는 피할 것이며, "비배타성", "포용성" 등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FAB4는 내용적으로 특정 "국가"를 견제하는 논의보다는, 네 국가가 협력을 통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예측가능성 제고와 함께 "국제규범(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을 강조할 가능성이 크다. FAB4가 비배타성을 강조한다면 중국도 FAB4에 참여 의사를 밝히겠지만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불공정한 관행이 "국제규범"에 어긋난다는 것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배제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거대한 소비시장의 역할만 할 뿐 상대적 약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레버리지가 부족한 중국이 실제적인 경제보복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FAB4에 어차피 참여하지 못한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반도체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깊은 한국, 대만과 같은 국가가 FAB4에 오히려 참여함으로써 중국의 이익을 어느정도 대변해주길 바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기조는 최근 중국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가 “한국이 부득이하게 'FAB4'에 합류해야 한다면 균형을 잡고 시정하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라는 사설에서도 드러난다.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정세: 미국의 대중 반도체 견제 강화
지난 몇 개월 동안 미국과 중국 간의 반도체를 둘러싼 갈등은 급속도로 첨예화되고 있다. 2018년 미국 정부가 수출통제와 외국인투자심사 제도를 강화한 이래, 미국 정부는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 있어 반도체 분야를 집중적으로 견제해 왔다. 2018년 D램 메모리 분야의 푸젠진화반도체, 2019년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의 하이실리콘, 2020년 파운드리(위탁생산) SMIC, 2021년 슈퍼컴퓨팅 관련 CPU 개발기업인 톈진 파이티움(Tianjin Phytium Information Technology) 등 차례차례 미국은 자국의 수출통제 리스트에 올렸다. 동시에 미국의 반도체 기업에 대한 중국의 M&A시도도 막아왔다.
그러나 위 조치들은 대부분 첨단 반도체 영역에서 중국의 추격을 막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0nm 이하 첨단 로직 반도체 제조를 위해 필요한 ASML사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중국이 수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마도 타깃은 중국의 파운드리 SMIC였겠지만, 중국에서 D램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SK Hynix도 다음 세대 D램 제조에 필요한 EUV 장비 수입을 2021년 11월 금지 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미국의 반도체 분야 대중 견제의 기조 변화와 함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더 이상 10nm 첨단 반도체에 국한된 견제가 아닌 보다 광범위한 제재를 시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8월 초 발효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다. 새로운 법은 527억 달러를 국내 반도체 산업에 투입하여 기업들이 국내 제조 능력을 구축하고 확장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핵심 조항 중 하나로 미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받는 기업의 경우 10년간 중국에 28nm 미만의 로직 반도체와 관련된 투자를 금지하도록 했다. 일단 중국의 파운드리 분야의 성장을 막은 것이다. 또한 메모리 관련 중국 내 투자 금지 내용도 2년마다 검토하여 제재 확대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중국 정부는 이 법안을 “냉전적 사고방식이자 제로섬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및 과학법은 중국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최근 움직임의 일부일 뿐이다. 미국은 바세나르 체제(WA: Wassenaar Arrangement)도 대중 견제에 활용하고 있다.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8월 12일 울트라와이드밴드갭(UWBG) 반도체에 사용되는 산화갈륨·다이아몬드, 집적회로 개발용 전자캐드(ECAD) 소프트웨어를 수출통제 기술 리스트에 추가했다. 상기 기술은 2021년 12월 바세나르체제 회의에서 합의한 품목에 포함된 기술들로서,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국의 반도체 기술 발전을 억제하려는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미국은 올해 첨단 낸드 메모리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식각 장비도 바세나르체제를 통해 전략물자로 지정하려고 하고 있다. 이 장비가 수출통제 품목으로 지정될 경우 중국에서 낸드 메모리 생산을 하고 있는 삼성과 SK Hynix는 차세대 제품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올해 7월 블룸버그의 SMIC 7nm 개발 성공 기사는 미국에 다시 한번 경종을 울렸다. 이미 수출통제를 받고 있던 EUV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구세대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만으로 멀티패터닝(multi patterning) 기술을 접목해서 10nm의 벽을 뚫은 것이다. 최근 램리서치(LAM Research), KLA 등과 같은 미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들은 미국 정부가 기존 10nm 이하 장비 수출 금지를 14nm미만 공정에까지 확대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DUV를 포함하여 14nm미만 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중국 내로 원활히 조달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더 이상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해질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우리의 대응 방향
결국 미국의 과도한 대중 견제정책의 활용은 우리가 FAB4에 참여할 유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내 우리 기업의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의 과도한 대중제재에 대해 오히려 FAB4를 통해 적극 협의함으로써 수위조절에 나서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사업은 모두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집중된 가운데 향후 FAB4를 활용해서 중국내 메모리분야 생산에까지 너무 엄격한 제재가 취해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협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인한 중국 시장 상실이 아니라 중국의 불공정 관행을 통한 시장가격 질서 파괴와 기술 추격에 주목해야 한다. FAB4를 통해 참여국이 아닌 중국을 직접적으로 견제하지는 못하겠지만, 불공정하고 과도한 정부보조금 지원을 받는 기업의 반도체 구매를 FAB4 참여국 기업들이 구매하지 못하도록 FAB4에서 논의는 가능할 것이다. 아직까지 시스템반도체나 D램 반도체는 격차가 있으나 낸드 플래시 반도체의 경우는 중국의 기술추격이 거센 상황이다. 그리고 그 대표주자는 YMTC다. 최근 미국의 애플(Apple)은 차세대 핸드폰 아이폰14에 삼성, LG와 더불어 중국의 BOE 디스플레이를 탑재한다고 밝혔으며, 낸드 메모리 칩의 경우 YMTC의 128단 제품도 탑재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YMTC가 이미 작년 파산한 바 있으며, 기술력 부족으로 수익성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통해 메모리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통상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약 80% 이상 수율이 나와야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반해 YMTC의 128단 낸드 메모리의 경우 수율은 7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기업의 메모리 반도체가 시장에서 구매될 경우 메모리 반도체 시장 질서가 파괴될 것은 분명하며, 결국 가격 싸움에서 밀리는 한국기업들의 경쟁력 유지는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요약하면,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는 미국의 대중국 제재 정책 및 법제도의 강화 그리고 중국의 불공정한 기술추격에 있는 것이지 FAB4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FAB4와 같은 논의체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우리 반도체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제조 강자가 모이는 그룹에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중요한 의사결정 작업에 우리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우리가 배제될 경우 우리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