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단행본

[세종정책연구 2026-01] 일본의 ‘역사전(歴史戦)’ 전개와 한일관계: 샌프란시스코 체제, 안보전략, 한국의 정책대응

등록일 2026-07-10 조회수 67 저자 이기태

본 연구는 일본의 역사전(歴史戦)’을 단순한 과거사 갈등이 아닌,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과 국가전략의 재구성 속에서 등장한 구조적 현상으로 분석한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미완성된 전후 청산, 탈냉전 이후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일본 국내에서의 보수 내셔널리즘 재부상이 결합되면서 역사전이 형성 및 확대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역사문제, 외교안보정책, 국내정치, 국제질서 간의 상호연계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연구의 주요 목적으로 설정한다.

 

우선 일본 역사전의 등장 배경을 전후 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연결하여 분석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일본의 재통합과 냉전 질서 안정에는 기여했으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포괄적 청산을 유보함으로써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구조적 토대를 남겼다. 이러한 미해결 구조 위에서 1980년대 이후 일본 보수 내셔널리즘이 재부상하였고, 1990년대 이후 장기불황과 사회적 불안은 자학사관 탈피와 국가정체성 재구성 요구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항일전쟁 서사를 중심으로 역사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전후 질서의 정당성에 도전하면서 일본 내 공세적 역사전의 필요성을 증대시키는 외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역사전은 아베(安倍晋三) 정부 시기에 국가전략 수준으로 본격화되었다. 자민당 강경파 내부에서는 안보 현실주의역사 수정주의라는 두 흐름이 결합하면서도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다. 안보 현실주의는 미일동맹 강화와 중국 견제를 중시하는 실용적 노선이며, 역사 수정주의는 전후 책임 담론 재구성과 국내 보수층 결집을 중시하는 이념적 노선이다. 아베 정부는 두 흐름을 전략적으로 결합하여 집단적 자위권 확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설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 추진 등 안보정책 전환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과서 검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담화 언어 조정, 국제 PR 활동 등을 통해 역사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2015년 아베 담화(전후 70주년 담화)는 기존 담화의 표현을 형식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책임의 범위와 지속성을 축소함으로써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시도하는 동시에, 일본을 규범 기반 질서의 수호자로 재정의하는 서사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사전은 일본의 안보정책 전환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완화하는 정당성 생산 장치로 기능하였다일본의 역사전은 한일관계에 구조적 영향을 미쳤다. 역사 문제는 외교 현안을 넘어 협력의 조건 자체를 제약하는 변수로 작용하며, ‘역사 갈등여론 악화정책 경직협력 위축의 악순환을 고착화시켰다. 특히 안보 영역에서는 한미일 협력의 필요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역사적 불신이 협력의 범위와 속도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2019년 수출규제 사례에서 보듯 역사 갈등은 경제·안보 영역으로 확산되며 복합적 갈등 구조를 형성하였다.

 

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도 역사전의 파급은 뚜렷하다. 상호 불매운동, 공급망 재편, 정체성 갈등 심화 등은 양국 간 상호의존 구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동시에 청년층을 중심으로 문화와 정치의 분리 현상이 나타나는 등 협력과 갈등이 병존하는 이중적 구조도 관찰된다.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미중 경쟁 속에서 역사전이 국제질서의 정당성을 둘러싼 상징투쟁으로 기능하며, 한일관계는 안보협력과 전략적 자율성 사이에서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한국의 정책 대응 방향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일본 내부의 안보 현실주의역사 수정주의를 구분하는 정교한 대응 프레임을 구축하고, 다양한 일본 내 행위자와의 다층적 네트워크를 활용해야 한다. 둘째, 역사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의 다자적·규범적 의제로 전환하여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함으로써 역사 갈등을 미중 경쟁의 도구로 종속시키지 않고 한국의 규범적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한일 양자관계에서는 역사 갈등의 구조적 관리와 동시에 안보·경제·기술 분야에서의 기능적 협력을 제도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역사전은 과거사 문제를 넘어 국가정체성 재구성과 외교안보전략을 매개하는 핵심 변수이며, 동아시아 질서 재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구조적 현상이다. 따라서 한국은 단기적 대응을 넘어 구조적 이해에 기반한 중장기 전략을 통해 역사 갈등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전환하고, 변화하는 지역 질서 속에서 전략적 자율성과 규범적 주도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