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를 모델로 하여 창설되었고, 현재에도 과거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가 수행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가 대외적으로 소련을 대표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처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도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고 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서 외국 사신의 신임장 및 소환장을 접수하고 외국 국가수반에게 축전과 위문전문을 발송해 그들이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도록 친선외교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 파견된 북한 대사가 주재할 국가의 수반에게 김정은 제1비서의 인사를 먼저 전달하고, 그 다음에 김영남 위원장의 인사를 전달하는 데서 확인되는 것처럼 김 제1비서가 북한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장관이 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외교활동을 북한은 여러 명의 파워 엘리트들이 나누어 전문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북한의 체제생존에 매우 중요한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외교는 김영일 당중앙위원회 국제 비서가 관장하고 있고, 북핵 및 대미 외교는 강석주 내각 부총리 및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남은 주로 이란, 싱가포르, 라오스 등 제3세계국가들과의 정상외교 및 비동맹운동에 대한 외교를 맡고 있다. 남한의 기준에서 보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상대하는 국가들이 김영일 비서나 강석주 부총리가 상대하는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제3세계국가들과의 외교를 바탕으로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국가인 것처럼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어 김영남의 외교활동은 특히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을 이끌어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정은 제1비서가 김정일 사후 지난 2년 동안 군사와 경제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공개활동을 했지만, 아직까지 정상외교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 제1비서가 앞으로 정상외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까지 외국 정상과의 외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담당하는 상황이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최고인민회의 휴회 중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정령을 통해 법령을 수정 또는 채택하고 있다. 북한이 687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약 10여명의 엘리트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법령을 채택하는 것은 민주주의체제의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토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김정은 제1비서와 노동당이 결정한 노선과 정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외국인 투자 유치 및 경제개방 관련 법령들의 대부분이 최고인민회의보다 이 기구에서 채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의 제정 및 수여를 통해 엘리트와 주민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고 있는데, 이 같은 부분은 그동안 북한 정치 연구에서 자주 간과되어 왔다. 탈냉전 이후 북한이 현재까지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데에는 엘리트와 주민에 대한 당과 군대, 공안기관의 통제력에 의존하는 바가 크지만, 감시와 통제 그리고 물리력만 가지고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 지도부가 엘리트와 주민 통제를 위해 ‘사탕’과 ‘채찍’을 활용하고 있다고 본다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바로 ‘사탕’을 주면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